“싱가포르 선언, 2005년 6자 합의보다 크게 후퇴… 뭘 계승하라는 건가”

안용현 논설위원 2021. 1. 2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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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의 뉴스 읽기] 文 “트럼프 계승”에 미국은?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미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과 관련, “트럼프 정부에서 이뤘던 성과를 계승해서 발전시켜야 한다”며 “싱가포르 선언은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구축에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다”고 했다. 21일 취임한 바이든 대통령에게 전임인 트럼프의 ‘싱가포르 성과’를 이어가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과 그 외교·안보 참모들의 공식 반응은 아직 없다. 속내는 어떨까.

바이든 대통령 외교·안보 참모의 트럼프·김정은 회담 평가

◇2000년 미·북 코뮤니케와 거의 같은 싱가포르 합의

최근 워싱턴의 민주당 인사들과 접촉한 외교 소식통은 “2018년 싱가포르 합의는 2000년 클린턴 민주당 정부 때 미·북 코뮤니케의 짝퉁 수준이라고 여기더라”고 했다. 민주당 정부가 18년 전에 한 것과 다를 게 없는데 뭐가 ‘성과’냐는 것이다. 당시 김정일 특사로 방미한 조명록 차수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싱가포르 합의처럼 ‘미·북 관계 근본적 개선’ ‘한반도 긴장 완화’ 등을 담은 외교 성명을 발표했다. ‘과거 적대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 수립’ ‘회담 중 모든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지’ ‘미군 병사 유해 발굴’ 등도 합의했다. 식량·약품을 포함한 인도적 지원 문제까지 협의했다. 싱가포르 합의보다 진전된 내용이 많았다. 이번에 국무부 부장관으로 지명된 웬디 셔먼이 코뮤니케 작성의 주역이었다.

이후 북한 비핵화에 관한 구체적 합의는 2005년 6자 회담에서 나왔다. 합의문 첫 항에서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명시했다. “북은 모든 핵무기와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 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했다”고도 밝혔다. 그런데 싱가포르 합의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모호한 내용만 담겼다. 2005년처럼 ‘북핵 포기’라는 말도 없다. 그 대신 쓰인 ‘한반도 비핵화’는 북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때 써먹는 말이다. 13년 전 합의문보다 후퇴한 걸 들고 ‘성과’라고 자랑하는 건 트럼프식 ‘TV 쇼’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민주당 측은 싱가포르 회담으로 한·미 연합 훈련이 중단된 걸 우려한다”고 했다. 바이든이 중시하는 동맹의 핵심이 연합 훈련인데 트럼프가 국방부에 묻지도 않고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앞으로 훈련은 철저히 군(軍) 입장을 반영할 것”이란 워싱턴 인사 얘기도 전했다. 싱가포르 회담은 ‘계승’이 아니라 ‘청산’ 대상이라는 뜻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첫날 서명한 행정 명령 17개 중 9개가 ‘트럼프 뒤집기’였다고 한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한국 정부가 바이든 측에 ‘싱가포르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만 좀 해달라. 그래야 북이 안심하고 회담에 나올 것 아니냐’는 말을 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바이든 측도 임기 초에 북 도발로 외교 판이 깨지는 건 원치 않을 것이란 계산을 하는 것이다. 실제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선 북한보다 코로나와 경제, 이란 핵, 중국 등이 더 급한 발등의 불이다.

◇트럼프 계승, 문 대통령에게 박 전 대통령 계승하라는 것

전 외교부 차관은 “트럼프와 내전(內戰) 수준의 선거를 치른 바이든 행정부에 ‘트럼프 계승’을 말하는 건 완전한 난센스”라고 했다. “막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 업적을 계승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바이든 입장에서 ‘트럼프’는 ‘적폐’와 동일어나 다름없다. 특히 트럼프는 바이든 승리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극성 지지자들의 미 의회 난입을 선동한 혐의로 탄핵 과정에 있다. 그런 트럼프 정책을 계승하자는 문 대통령을 바이든 대통령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문 대통령이 ‘싱가포르 성과’를 강조하는 건 북이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외교 치적으로 선전하는 것과 관련 있을 수 있다. 북은 이번 노동당 대회에서도 “북미 수뇌회담은 세계 정치사의 특대 사변”이라고 했다. 바이든 측이 싱가포르 회담 결과를 공개적으로 깔아뭉갤 경우 북이 반발하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문 대통령이 새 외교장관에 정의용 전 안보실장을 기용한 것은 2018년 싱가포르 회담 재연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 조야에선 당시 정 실장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부풀려 전해서(oversell) 트럼프의 ‘쇼 본능’을 자극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외교 전문가인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처럼 문 정부가 말하는 ‘북 비핵화 의지’를 믿을 가능성은 없다. 실제 바이든 대통령은 싱가포르 회담 직후 “미국이 더 안전해지지도 않았고 미국의 영향력만 더 감소했다”고 비판했다. 작년 대선 토론에선 세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을 “방송용”이라고 했다. “단 하나의 북 핵무기도 파괴되지 않았고 단 한 명의 검증단도 현지(북)에 없다”고도 했다.

바이든의 외교 사령탑인 블링컨 국무장관은 더 직설적이다. 트럼프·김정은 회담은 “무의미했다”며 “(트럼프의) 거래의 기술은 김정은에게 유리한 도둑질의 기술로 바뀌었다”고 했다. “김정은의 핵 포기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이든과 블링컨 모두 김정은을 “불량배(thug)”라고 불렀다. 외교 투톱이 될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도 싱가포르 회담 직전 “북은 경제적으로 숨 쉴 공간을 얻으려고 (핵 관련) 약속을 하고 나중에 파기하는 것이 오랜 전략”이라고 했다. 윌리엄 번스 CIA 국장 내정자 역시 지난해 “세 차례 미·북 정상회담 시도가 의미는 있지만 김정은은 가까운 장래에 비핵화를 할 의지가 없다”고 했다. 트럼프 팀과 달리 바이든 팀은 외교·안보 현장에서 수십 년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북핵 문제가 어렵다는 것도 알고 북한 기만술에 쉽게 넘어갈 사람들도 아니다.

바이든 시대에 트럼프식 김정은 쇼가 재연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다만 바이든 정부의 북핵 해결 방식이 우리 안보에 더 바람직할 것이냐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바이든 정부엔 외교 협상과 군축을 강조하는 전문가가 다수 포진해 있다. “북핵 해법도 이란 핵 협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북핵은 이란 핵과 크게 다르다. 군축은 ‘동결’에서 시작되는데 북핵 동결은 사실상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전 외교 고위 당국자는 “과거 미국이 북핵을 군축 차원에서 다루려 했을 때 역대 한국 정부는 강하게 반대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오히려 환영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1년여 남짓 남은 문 정부 임기 내에 그 정도 진도를 낼 수 있을 만큼 바이든 정부가 북핵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바이든 외교서 북한은… 이란 핵·중국·러시아 이어 4순위쯤]

미 바이든 행정부 앞에 놓인 외교·안보 현안의 시급성은 이란 핵, 중국, 러시아(나토), 북한 순인 것으로 분석된다. 블링컨 국무장관의 인준 청문회에선 이란과 중국이 100번씩 언급되는 동안 북한은 15번쯤 나왔다. 대선 기간 바이든 캠프는 트럼프 대통령이 파기한 이란 핵 협상 복귀를 첫째 외교 공약으로 내세웠다. 바이든이 부통령 시절 깊숙이 관여한 협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란이 심상치 않다. 3.67%로 제한된 우라늄 농축 농도를 20%로 올리겠다고 하고 트럼프 제재 때문에 묶인 돈을 내놓으라며 한국 배를 억류하기도 했다. 특히 오는 6월 이란 대선을 앞두고 대미 강경파인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이 재출마를 선언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상황이다. 강경파가 당선되면 이란은 다시 핵 개발에 나설 수도 있다. 중동 전체가 위험해진다.’중국 압박’은 바이든 행정부가 유일하게 계승할 트럼프 정책일 것이다. 미국 내에서 이론이 없다. 올 7월이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다. 시진핑 주석은 ‘중화 부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중국 견제를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한국·일본·호주 등 동맹 결속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가 흔들어놓은 나토 동맹 관리도 시급하다.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센터장은 “현재 북한 문제는 4순위쯤 된다”며 “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북한 문제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3월 예정된 한·미 연합 훈련도 북 도발을 부를 정도로 대규모는 아닐 것으로 예상했다. 인도적 지원으로 시간을 벌려 할 것이다. 경제난이 심각한 북한이 관심 순서를 앞당기려고 전략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최대 변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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