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무명이 판을 바꾼다
필자는 10년 가까이 공공 기관이 지원하는 패션 디자이너 컨설팅 업무를 해왔다. 그러다 보니 가끔 왜 세금으로 패션 디자이너를 지원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패션 디자이너는 돈 잘 버는 화려한 사람들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여기에는 ‘패션은 사치재’라는 인식도 일부 있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개인 디자이너에게 시장의 벽은 매우 높다. 전 세계에서 매해 수천, 수만 명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새로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자기만의 확실한 아이덴티티(정체성)로 어필하는 건 너무나 어렵고, 상당한 시간이 누적돼야 꿈꿔볼 수 있는 일이다. 또 독창적인 디자인은 실구매자가 적고 수익을 내기도 어려워 초기에 누군가 지원해주지 않으면 사장될 가능성도 매우 크다. 하지만 소수의 창의적 디자이너들이 패션 시장과 관련 소비재 산업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상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공공기관이 이들의 시장 진입을 돕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에게는 ‘한국의 이세이 미야케’와 같은 걸출한 디자이너를 배출하고 싶다는 사회적 욕구도 있는 것 같다.
이런 공공 지원은 아무래도 소위 ‘엘리트 디자이너’에게 집중되는데, 스타는 다소 의외의 지점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패션 문외한이라던 아티스트들이 모여 패션쇼 한번 안 하고 활동하다가 뉴욕과 유럽 바이어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세계 무대로 강제 진출한 ‘아더에러’가 대표적이다.
한복 분야에서도 정식으로 배운 적 없던 이들이 한복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어 흥미롭다. 한 스타일리스트가 연출했던 감각적인 한복 이미지가 한복 현대화에 불을 붙였고, 임업공무원 지망생과 관광업 종사자가 K팝 스타 의상을 만들며 스타 디자이너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뉴욕 유학 중 본인은 분명히 서양복을 만든다고 만들었는데 한국적 느낌이 너무 좋다는 호평을 듣고 한복 디자이너로 전향하신 분도 있다.
언제 어디에서 이런 게임 체인저들이 등장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제2·3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배움’은 힘겹고 필사적인 직업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전문교육이 꼭 필요한 영역에서는 재교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도 이제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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