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선 LIVE] '박지원·정의용·서훈' 트로이카의 꿈
트럼프 유산 미련 두다가 바이든 만나기 前 역효과
2018년 3월 초 워싱턴행 비행기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대북 특사단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후 김 위원장이 미국에 전하는 메시지를 들고 워싱턴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때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그 제안을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음날 정 실장은 백악관에서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 다음부턴 아시는 바와 같다. 그해 6월 싱가포르에서 첫 미·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이어 하노이, 판문점에서 미·북 정상의 만남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는 한발도 진전이 없었고 북한의 핵능력은 오히려 강화됐다. 트럼프의 이벤트로서는 최고였으나 북한에게 시간만 벌어주고 끝났다. 그래서 정 실장은 트럼프에게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잘못 해석해 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샀다.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이 외교부 장관으로 돌아온다. 정의용이 귀환해 박지원 국정원장,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트로이카를 재정비하자, 극적이었으나 허망했던 트럼프 시절 미·북 외교가 떠오른다. 이들 3인의 특장이 ‘북한’과 ‘정상회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박·정·서 트로이카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와 각각 정상회담을 할 때 막전막후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이들 3인이 외교·안보·통일 이슈를 주도하게 되자, 문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미·북,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비슷한 시도를 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등장하는 건 그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최근 신년 기자회견에서 “2018년 싱가포르 공동선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워싱턴에선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 지우기에 열을 올리는데 한국은 트럼프 유산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꼴이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정부와 함께 다뤄야 할 북핵 문제를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속편’쯤으로 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태평양 건너 분위기는 다르다. 바이든 외교팀은 속편이 아니라 개정판을 만들고 싶어 한다. 블링컨 국무장관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북핵 상황에 대해 “더 나빠졌다”고 평가했고,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바이든 팀은 오바마 시절 ‘전략적 인내’를 기조로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신중파들이다. 협상 결과에 대한 준비도 없이 트럼프 스타일로 밀어붙이는 톱다운형 이벤트보다는 다자가 참여해 비밀리에 오래 협상하는 이란 핵협상 방식을 더 선호하는 팀들이다.
블링컨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미국이 당면한 위협으로 이란, 러시아, 북한 등을 거론했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 외교안보 어젠다 중 북핵문제의 우선 순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리 높지는 않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워싱턴의 한 전직 외교관은 “북한이 조급해져서 먼저 도발하지 않는 한 바이든 정부가 급하게 뛰어들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집권 기간 동안 엉망이 된 국내외 문제를 복구하고 치유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이 될지 평화체제가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박지원·정의용·서훈 트로이카는 문 대통령 임기 내에 미·북, 남북 관계에 한 획을 긋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어 마음이 급할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서두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방위비 분담금 문제와 전작권 전환, 한미연합훈련 재개 등 동맹 이슈가 산적해 있다. 이런 문제를 풀 생각은 안하고 트럼프 유산 지키기를 고집하면 역효과만 날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와 첫 악수를 나누기도 전에 악수(惡手)를 둘 수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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