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준의 가타부타] 존엄한 죽음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입력 2021. 1. 2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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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참 외롭게 죽는다. 감염된 중환자만 외롭게 사망한 것이 아니다. 노화나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병원이 가족의 출입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는 바람에 임종을 못했다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부모가 떠나는 마당에 마지막 길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많은 상주들이 코로나 전파 우려에 문상조차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상가는 떠들썩해야 슬픔을 잊기 쉬운 법이다. 젖은 눈을 한 사람들만 모여 서로를 위로해주는 자리에서 슬픔은 더 무거울 것 같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코로나 방역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21일 오후 3시 현재 한국 1316명, 전 세계에선 207만4616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니 죽음을 다시 곱씹어보게 된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나 혼자 죽을 수 있다. 홀로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확산에 죽음의 현장은 격리되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삶과 죽음의 공간은 분리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선(線) 위에 있다. 삶의 마지막 매듭이 죽음이다. 평생을 안온하게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현대사는 전쟁과 혁명, 경제위기, 재난으로 얼룩져 있다. 사람들은 역사의 파도를 타고 넘기도 하고, 휩쓸려 부서지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사업이 박살나고, 가족 해체를 겪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삶이란 세상사를 살과 피로 겪어내는 일이다. 한 명의 개인은 작은 이야기를 품고 지나가는 하루살이가 아니다. 저마다 기쁨과 슬픔, 영광과 굴욕의 서사가 있고, 그걸 함께 나눴던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이 있다.

삶의 대단원인 마지막 매듭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먹고살기 위해 고개를 꺾거나 무릎을 접고 살 수밖에 없던 사람을 안아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가족들, 그들의 손 한 번 잡아보는 것, 눈 한 번 쳐다보는 것이 소중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임종(臨終)을 중시한다. 문명도 ‘죽음의 의례’와 함께 시작됐다. 문명의 시작점이라 할 만한 유적에선 죽음의 의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산업화 이후 인간의 죽음은 초라하고 쓸쓸해졌다. 노인들은 생활의 공간을 떠나 병원에서 생을 마친다. 요양병원으로 옮길 때 많은 노인들이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단다. 거기서 생면부지의 타자와 섞여 생의 마지막 고비를 맞게 된다. 병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배어 있는 집에서 임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조차 이뤄지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노인 돌봄을 모두 가족에게 맡길 수도 없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사회가 거들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인 돌봄도 제도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돌봄노동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죽음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수년 동안 의식 없이 병상에 있다가 세상을 뜰 수도 있다.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의 주체는 죽음을 앞둔 당사자여야 한다. 하지만 환자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다. 생의 마지막은 법과 의학과 종교와 윤리가 부딪치는 지점이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며 함부로 버릴 수 없다. 하지만 시한부 환자가 자신의 뜻에 반해 고통을 버티다 삶을 마감하게 하는 것도 절대선은 아니다. 많은 경우 생명연장치료가 가족에게 위안을 준다. 심폐소생술을 지켜본 환자의 가족이 불안과 우울증을 덜 겪는다는 보고도 있다. “할 수 있는 것 다 해드렸다”는 안도감이다.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연명치료 중단 계기가 된 판결은 20대 여성 캐런 사건이었다. 술을 마시다 쓰러진 뒤 혼수상태에 빠져 연명치료를 받았고, 몸무게는 52㎏에서 32㎏까지 줄었고 소생 가능성은 없었다. 항소심 법원이 ‘죽을 권리’를 인정하면서 든 이유는 생명권이 아니라 사생활권이었다. 나라마다 연장치료 중단부터 의사조력자살까지 존엄사를 인정하는 기준이 크게 차이가 난다. 안락사를 도입했다 폐지한 나라도 있고, 묵인하는 나라도 있고, 합법화한 나라도 있다.

의료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뇌사란 개념은 미국 하버드위원회가 1967년 만들었다. 의료도 완치가 중요하지만 치료 이후 삶의 질도 고려하는 식으로 바뀐다. 생명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 존엄하게 죽을 수는 없을까? 코로나19로 더 도드라진 ‘죽음의 격리화’가 죽음의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 인간답게 살 권리와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다르지 않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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