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소외된 이들을 위한 슈퍼영웅담

김선영 TV평론가 2021. 1. 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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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OC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장면. OCN 제공

사회적 약자가 사회안전망에 의해 보호받지 못할 때, 슈퍼히어로는 출현한다. 지난해 처음 공개된 두 편의 슈퍼히어로 드라마,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과 OCN <경이로운 소문>은 사회취약계층에게 더 혹독했던 위기의 시대에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도착한 작품들이다. 그동안 국내 드라마계에서는 초현실적인 악이 아닌 현실의 거대 권력과 맞서는 검찰, 경찰 등의 공권력 히어로들이 주로 사랑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슈퍼히어로물이 잇달아 등장한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초인적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김선영 TV평론가

더 흥미로운 점은 두 작품이 약자를 구원하는 슈퍼영웅의 이야기라기보다 직접 영웅이 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데 있다. 가령 <보건교사 안은영>의 주인공 은영(정유미)은 소위 ‘정상성’에서 살짝 벗어난 괴짜로 취급받는 소외된 싱글 여성이다. <경이로운 소문>의 주인공인 ‘카운터’들도 마찬가지다. 끔찍한 사고로 부모를 잃고 다리에 장애를 지니게 된 청소년 소문(조병규)부터,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가족을 다 잃고 겨우 살아남은 젊은 여성 하나(김세정), 교통사고로 아들을 먼저 보낸 고독한 중년 여성 매옥(염혜란)까지, 전직 형사였던 가모탁(유준상)을 제외한 카운터들은 모두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놓여 있다.

주인공들의 이 같은 특성은 두 작품을 소외된 이들을 위한 영웅물로 만든다. 말하자면 진정한 서민 슈퍼히어로물의 탄생이다. 이들은 초인적 힘을 지니긴 했으나 ‘어벤져스’ 같은 울트라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뚜렷한 한계를 지닌 존재들이다. 대표적 사례로 안은영의 주무기인 비비탄총과 “무지개빛 늘어나는 깔대기형 장난감 칼”은 일정 시간 사용하고 나면 반드시 충전을 필요로 한다. 카운터들 역시 “절대 혼자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슴에 품고 싸운다. 그리하여 가장 낮은 땅에 위치한 슈퍼영웅들은 바로 곁에 있는 약자들의 현실에 더 밀착한다. 안은영은 영웅 이전에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인물이다. 그는 입시경쟁의 강박과 각종 규제에 억눌리는 학생들, 가난·성적 지향성 등을 이유로 혐오와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파수꾼이다.

그런가 하면 <경이로운 소문>의 카운터들은 재개발이 진행 중인 허름한 동네의 한가운데 터를 잡았다. 그들은 평소에는 국수 가게의 자영업자와 노동자로 일하며 언제 나타날지 모를 악귀와의 싸움에 대비한다. 악귀는 대부분 동네의 어둡고 좁은 골목 속으로 잠입해 가장 취약한 이들의 상처를 파고든다. 가정폭력에 고통받는 여성과 아이, 철거촌의 빈집에 숨어든 아이들, 상사의 폭력에 시달리는 사회 초년생, 비리 기업의 환경범죄로 치명적인 질환을 얻은 아이들 등 극중 피해자들은 이미 현실의 폭력에 노출된 약자들이다. 카운터들은 이들에게 지극히 친밀한 이웃 또는 형, 누나의 얼굴로 다가간다.

두 드라마가 유독 연대와 공조의 힘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한한 초능력이 아니라 한계와 결핍을 지닌 존재로서의 영웅들은 타인과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통해 악과 싸울 에너지를 얻는다. 예컨대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은영에게 기운을 불어넣는 존재들은 장애를 지닌 한문 교사 인표(남주혁)와 미숙한 학생들이다. 각각 혼자일 때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을 때 거대한 괴물과 맞설 힘을 얻게 된다. <경이로운 소문>의 카운터들도 그러하다. 신비한 힘을 주는 융의 땅을 불러올 수 있는 소문, 괴력의 소유자 모탁, 인간 레이저 하나, 치유력을 지닌 매옥 등 각자에겐 고유의 초인적 능력이 있지만, 결코 혼자서는 가장 높은 단계의 완전체 악귀와 맞서기 어렵다. 이들은 함께 모여 서로의 힘을 연결한 결계를 만들 때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요컨대 <보건교사 안은영>과 <경이로운 소문>은 지극히 한국적 현실에 안착한 슈퍼히어로물이자 동시에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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