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남긴 빵 한 덩이

2021. 1. 2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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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펄펄 길은 꽁꽁, 행여 미끄러질까 발끝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동네마다 전통적인 돌화덕에서 이 빵을 굽는 가게가 있으니, 우리가 아침마다 밥을 안치듯 매일 신선한 빵을 사러 간다.

그리고 또다시 눈발 속에 옷을 벗어 건넨 이름 모를 한 사람을 만나며, 누군가에게 전해질 빵을 남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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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 빵가게 ©게티이미지뱅크

눈은 펄펄 길은 꽁꽁, 행여 미끄러질까 발끝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참 예쁘게도 눈이 온다는 감탄은 따뜻한 창안에서나 가능한 일, 외투를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질퍽질퍽한 진창을 피해 걸으려니 등까지 뻣뻣하다. 머리에는 "어서 집으로" 이 말밖에 안 떠오를 순간. 너무 추우니 커피 한잔만 사달라 부탁하는 노숙자에게 자신의 두터운 점퍼를 벗어주고 장갑까지 꺼내 주곤 총총히 사라진 이가 있었다. 때마침 지나던 어느 일간지 사진기자에게 포착된, 이 혹한의 계절에 만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이 추운 날, 겉옷을 벗어 준 그분은 어찌 갔을까? 쏟아지는 눈 속에서 옷을 입혀 주는 모습에 잠시 마음이 먹먹해졌던 사람들은 그의 집까지 갔을 길을 걱정한다. 어떤 이의 안위를 걱정해 준 누군가의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져 주변을 살피게 된다. 내가 푸근한 옷이 필요한 날이면, 다른 이도 춥겠구나. 내가 더운 밥이 먹고픈 시간이면, 다른 이도 배고프겠구나. 이런 생각들이 줄지어 일어난다. 밥 대신 빵이 주식인 터키인들이 따끈한 빵을 사러 갈 때면 허기진 이웃을 불현듯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가 물 인심에 후하다면 터키 식당은 빵 인심이 넉넉하다. 좀 근사한 레스토랑에선 화덕에서 방금 구운 빵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주고, 서민들이 즐겨 찾는 식당에선 커다란 밀폐용기에다 숭덩숭덩 자른 빵을 잔뜩 담아 놓는다. 양의 머리와 내장을 푹 고은 기름진 수프나 렌즈콩을 곱게 갈아 만든 담백한 수프 한 그릇을 주문하고는 무한 제공되는 공짜 빵과 함께 뜨끈하게 속을 채우는 건, 터키 노동자들의 흔한 식사 풍경이다. 이 빵이 바로 고소하고 쫄깃한 터키식 바게트 에크멕(Ekmek)이다.

동네마다 전통적인 돌화덕에서 이 빵을 굽는 가게가 있으니, 우리가 아침마다 밥을 안치듯 매일 신선한 빵을 사러 간다. 그러니 갓 구운 빵 한 덩어리는 터키사람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힘. 정부가 운영하는 빵 판매소도 저렴한 가격으로 생계를 지원하지만, 그마저도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내가 빵을 사면서 한 덩이를 더 계산하고 남겨놓을 수 있다. 오스만 시대부터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풀던 전통이 현대의 빵집으로 이어진 것인데, 대롱대롱 봉지에 담아서 걸어 놓은 모양 그대로 '매달린 빵(Askıda Ekmek)'이라고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남은 빵을 비닐에 담아 대문 밖에 걸어 놓은 모습도 자주 보인다. 주는 이가 누군지 받는 이가 누군지 알 필요도 없이, 누구라도 원하면 가져가란 뜻이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에 들어온 지 1년, 서로의 기운을 북돋다 지쳐버린 이들에게 올겨울 풍경은 유난히 감정을 건드린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눈길에서 옴쭉달싹 못하며 화가 치밀기도 했고, 헛바퀴 도는 버스를 밀어주는 사람들 모습에 코 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모처럼 쌓인 눈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며 아이처럼 들떴다가, 정성껏 만든 눈 조각작품을 순식간에 박살내는 사람을 보며 와장창 동심이 무너지기도 했다. 그리고 또다시 눈발 속에 옷을 벗어 건넨 이름 모를 한 사람을 만나며, 누군가에게 전해질 빵을 남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언제나 완벽하지 않은 세상의 빈틈을 메우고 고쳐 나가는 건 우리 인간에게 남겨진 몫이었으니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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