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부족해서" 법원행정처 '조언' 듣고 결정 바꿨을 뿐이라는 판사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33)]

이혜리 기자 2021. 1. 21.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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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미숙함'

[경향신문]

2015년 7월1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법관 임명식에서 한 신임 법관이 임명장위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판사에게 있을 수 있는 오류를 바로잡거나, 판사의 정확한 판단을 돕기 위해 사법행정권자가 특정 사건의 재판에 관해 말이나 자료를 전하는 것은 허용될까.

사법농단 재판에서 판사의 ‘미숙함’이 쟁점이 됐다. 재판 개입의 대상이 된 몇몇 판사들은 법정에 나와 재판에 개입한 사법행정권자를 탓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부족했다고 증언했다. 자신이 실수로 놓친 부분을 사법행정권자가 바로잡아줬으며, 오히려 자신이 적절한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전례가 없고 법리적으로 복잡한 쟁점이라는 이유로 법원행정처가 특정 사건을 검토해 재판부에 자료를 준 일도 있다. 피고인들은 이것은 ‘조언’이나 ‘재판 지원’일 뿐, 재판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재판에 대한 직무감독권이 존재하지 않아 형법상 직권남용죄는 성립하지 않고, 이런 형태의 재판 관여는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명백한 오류가 있을 때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에 대한 직무감독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검찰은, 사법농단 사건은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고 했다. 재판의 당사자들은 모르는 상태에서 결론을 일정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뤄진 ‘재판 개입’이라고 했다.

■재판 개입 대상 판사들 “제가 부족했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의 어느 유리창에 눈을 가리고 한 손엔 법전, 다른 손엔 저울을 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법의 여신상을 장식해놓은 게 보인다. 창문 너머로 법원 깃발이 나부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7일 임성근 판사의 2심 재판에 김윤선 판사가 증인으로 섰다. 김 판사의 법정 증언은 처음이다. 임 판사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으로 있을 때 야구선수 임창용·오승환씨 사건을 정식재판에 회부하지 말고 약식명령 처리하게 시킨 혐의(직권남용) 등으로 기소됐다. 김 판사가 사건 담당자였다.

김 판사는 처음에 기록을 보니 검찰이 수사를 석연찮게 중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도박 규모가 더 크겠다는 의문이 들어 약식명령으로 끝내지 않고 정식재판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공판회부 결정’이라는 메모를 실무관에게 줬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넘지 않은 때 임 판사가 김 판사를 불렀다. 임 판사는 ‘(단순도박죄는) 징역형이 없는데, (다른 판사들과) 상의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김 판사는 단순도박죄 법정형의 벌금 상한이 1000만원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징역형이 없는지는 임 판사가 말했을 때야 알았다고 했다.

김 판사는 임 판사 말을 들은 후 실무관에게 공판회부 결정을 ‘보류’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법원 청사의 여러 층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직급의 판사들에게 사건 개요를 설명하고 의견을 물었다. “판사님들은 저한테 적절히 판단하라고 했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 돌아와서 고민하다가 공판회부까지 했는데 700만원(검찰 구형) 그대로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공판회부를 하지 않고) 내가 벌금형의 최고형으로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결정을) 바꿨습니다.”(김 판사)

애초 공판회부 결정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을 못해봤느냐는 검사 질문에 김 판사는 “그렇게 깊이 있게 생각하고 결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건에서는 공판회부 결정을 했다가 취소한 적도, 여러 층을 돌아다니며 판사들에게 의견을 물어 처리한 적도 없었다면서도 임 판사 말이 재판권 침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제가 최종 결정을 함에 앞서 놓친 부분이 그런 부분(단순도박죄는 징역형이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언으로 받아들였고요. 수석부장님이 제가 형사부 가서 안 게 아니고 그 전에도 법원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이미 좀 친분이 있다고 할까요.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합창단) 활동하면서 자주 뵀던 분이라 강압적인 요구라거나 큰 부담으로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 제가 바른 결정을 하도록 조언을 받는 쪽이었고, 미흡한 부분이 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었습니다. (…) 언제든지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게 판사 아닌가요?”(김 판사) 김 판사는 당시 2~3주에 약식명령 사건을 500건씩 배당받았다고 했다. 그는 14년차 판사였다.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법률심판 제청 결정을 했다가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던 염기창 판사도 2019년 12월19일 이 전 상임위원 재판에서 비슷한 증언을 했다.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을 인정하면 대법원 권한이 축소된다는 차원에서 법원행정처는 염 판사 재판부 결정의 파장을 우려했다. 염 판사는 이 전 상임위원의 말이 대법원 수뇌부에서 내려온 ‘공적인 연락’이라고 생각했다면서도, ‘조언’으로 받아들였고 그 내용에 수긍했기 때문에 최종 결정을 바꿨다고 증언했다.

“저는 한정위헌·단순위헌이 그런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정을 했고, 막상 이규진 부장님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가 너무 나무만 보고 전체 숲을 보지 못한 느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를 했죠. (…) 질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셨고 법원행정처가 아니라 (법원 내 연구모임인) 헌법연구반 이야기를 하셔서 ‘아, 이런 문제가 있구나. 내가 그 부분을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도 좀 들었습니다, 사실.”(염 판사) 김 판사와 염 판사 둘 다 먼저 조언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전 상임위원 사건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의 윤종섭 재판장이 염 판사에게 직접 물었다.

“원 결정을 직권취소하면서 취소의 사유로 삼은 것은 무엇입니까?”(윤 재판장)

“단순위헌과 한정위헌을 둘러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사이의 갈등관계를 고려해서 단순위헌으로 고쳐도 별 지장이 없을 것 같다는 조언을 받고서 한 것입니다.”(염 판사)

“그 조언이 직권취소의 사유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까?”(윤 재판장)

“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염 판사)

“그 사유를 결정문에 기재하였습니까?”(윤 재판장)

“기재 안 했습니다.”(염 판사)

“기재를 안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윤 재판장)

“취소 결정문은 (사유를) 기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재를 안하는 경우도 있고요. 대외적으로 보안을 유지해야 해서 (결정문) 검색 제외 요청도 한 상황에서 특별히 사유를 기재한다는게 궁색해 보였습니다.”(염 판사)

“증인이 당시 이규진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윤 재판장)

“아닙니다. 그렇게 얘기한 적 없습니다. 얼굴보고 인사만 하는 사이였습니다.”(염 판사)

■‘재판 지원’에 특정 사건 검토도 포함?

‘재판 지원’ 관련해 사법농단 재판에서 나온 말들
청와대 요청에 만든 통진당 자료
담당 판사들이 요청 안 했어도
e메일로 개별 전달한 이유 묻자
“사건 영향 준다는 오해 살까봐”
검찰 눈엔 ‘개입’ 제 눈엔 ‘지원’

공방은 법원행정처가 할 수 있는 ‘재판 지원’의 범위에 특정 사건에 대한 검토자료를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도 포함되느냐로 이어진다.

2014년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정부는 법원에 통진당의 잔여재산을 환수하기 위한 가압류 신청을 했다. 그런데 가압류와 가처분 중 어떤 형태의 신청이 맞는지가 문제였다. 청와대의 김종필 전 법무비서관이 임종헌 전 차장에게 검토자료를 요청했다. 법원행정처는 자료를 만들어 청와대에 건넸다. 그러면서 통진당 잔여재산 관련 사건을 담당하던 전국의 재판부에도 자료를 보냈다. 자료엔 ‘가압류가 아닌 가처분이 맞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검찰은 이 같은 자료 전달이 재판 독립 침해라고 보고, 지시를 내린 임 전 차장 등을 직권남용죄로 기소했다.

본인도 판사 출신인 김 전 비서관은 검찰에서 이런 진술을 했다. “우리나라 재판 현실상 모든 재판부가 충분히 성숙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청 사건에 대해서는 기존에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쟁점들이 수시로 있어서 재판부에서 관련 쟁점을 잘 검토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통진당 사건의 경우 쟁점이 많고 법리적으로 어려워서 한쪽이 반드시 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통상 사건처럼 내버려두게 되면 명백히 오류가 있는 판단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적절한 결론을 내리겠지만 그렇게 되면 중간에 판사들마다 결론이 달라지는 것 때문에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저하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법원행정처에서는 편람의 형태로 배포하기도 하기 때문에 통진당 사건에 대해서도 법원행정처에서 자료를 만든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김 전 비서관)

법원행정처가 검토자료를 만든 동기가 청와대 요청 때문이었느냐는 질문에 당시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이었던 윤성원 전 판사는 2019년 11월29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 나와 “아니다. 일선 판사들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일부 판사가 먼저 법원행정처에 재판 쟁점을 문의했고, 이에 따라 법원행정처가 법리 검토를 해 자료를 나눠줬다는 것이다. 그는 그게 ‘재판 지원’이라고 했다. 오히려 법원행정처 자료로 인해 판결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판사 자격이 없다”며 “압박용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사법지원실 심의관이었던 최우진 전 판사는 일선 판사로부터 ‘전국적으로 통진당 가압류 사건이 많이 있는데 법원행정처 차원에서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전화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다만 자료는 문의하지 않은 판사에게도 전달됐다. 모든 판사들이 볼 수 있는 법원 내부통신망인 코트넷에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e메일로 판사들에게 개별 전달한 이유에 대해 최 전 판사는 ‘법원행정처에서 사건에 영향을 주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서’라고 했다.

“공개법정에서의 소송 절차가 아닌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당사자 몰래 담당 법관에게 자료를 전달하는 게 법상 허용될 수 있습니까?”(검사)

“검찰의 눈으로 볼 때는 ‘재판 개입’이라고 하는 것이고, 제 눈으로 볼 때는 ‘재판 자료 제공’입니다. ‘재판 지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료가 필요한 재판부에 전달할 내용이고 자료가 필요하지 않은 재판부에는 전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e메일로) 제공한 것입니다.”(윤 전 판사)

검찰은 이미 핵심적인 업무지침이나 쟁점에 관한 판결례 등은 법원행정처가 만드는 ‘법원 실무제요’와 ‘업무편람’에 담겨 배포되고 있고, 재판 지원에 특정 사건의 쟁점을 사전 검토해주는 것까지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법원행정처는 제·개정으로 법이 달라져 재판에 참고할 필요가 있을 때 자료를 공유하는 정도만 허용된다고 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내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거 ‘도제식 교육’ 법원 문화
담당 분야 변동 잦은 인사제도
엄청난 업무량까지 겹치면서
사법행정권자 ‘조언’ 기대게 돼

젊은 나이에 법복을 입은 초년 판사에게 선배 법관들이 도제식 교육을 하던 과거의 법원문화가 법관 독립의 가치를 외면하게 된 배경은 아닐까. 법관이 처리해야 할 과중한 업무량과 근무 법원이 자주 바뀌는 법관 인사제도도 법관이 사법행정권자의 ‘조언’ 혹은 ‘재판 지원’에 기대게 만든 요인은 아닐까. 지난해 11월5일 이규진 전 상임위원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재판에서 김용신 판사가 물었다.

“‘누군가 법관을 뒤에서 돌봐줘야 한다, 왜냐면 아직 (재판을 많이 해본) 경험이 없다, 잘할까? 어떡하지? 가르쳐줘야 되는 것 아니야?’ 이런 후견적 입장이 과거 (법원의) 현실이었지 않았나…. 그 과거를 돌아볼 때 사법 지원이라는 것이 권한으로서 완전히 부정되는 게 맞느냐, 그런 생각도 드는데요.”(김 판사)

이 전 실장 측 민병훈 변호사가 답했다. “사법 지원의 필요성은 충분히 있고요. 일반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특정 사건)은 구분되고, 구체적인 것에 대한 지원은 불가하다는 입장에 서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것이 허용되는 이유는 법관이 그것을 반영할지 말지 완벽한 권한을 갖기 때문입니다. (사법농단 사건에서) 이른바 ‘양승태 사법부’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결국은 재판 잘하고 실력 좋은 엘리트 법관들이 사법의 윗사람이 됐을 때 가지는 걱정인데요. 저는 한마디로 오만한 태도라고 규정합니다. (…) 실력 좋으신 분들 눈에는 개별 판사들의 판결이 부족해 보이지만, 국민이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스템이거든요. 심급(한국은 3심제)이 있고요.”(민 변호사)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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