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50명과 50여차례 답사 '내 고향의 인문학' 발굴했죠"

강성만 2021. 1. 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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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안재원 교수
오른쪽부터 안재원 교수, 소재두 대표, 최미숙씨, 김하광 대표. <보절면지>와 부록인 그림 지도 ‘보절12경과 하트길’을 보이며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세상 사는 데 이익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만 살면 얼마나 힘들어요. 비즈니스사회에서 결코 받을 수 없는 위로나 정을 고향에서 받아요. 고향 보절은 나의 일부이죠.”

최근 논형 출판사에서 나온 <보절면지-보배와 절의가 숨어있는 보절이야기>(발간위원장 안한수·편찬위원장 이현기) 대표필자인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의 말이다.

<보절면지> 표지.

그는 16살에 떠나온 전북 남원시 보절면을 지난해만 37차례나 찾았다. “3년 전 여름에 이현기 선생님 권유로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면지 발간에 참여하기로 맘먹고 52차례나 보절면 일대를 답사했어요.” 그의 보절행에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보절중학교 동기 김하광 대표와 보절 출신 사진동호회 ‘보사노바’ 회원 최미숙씨 등 출향인 약 50명이 시간이 될 때마다 동행했단다. 보사노바는 ‘보절 사람들이 사진으로 노는 바다’를 줄였다고 한다.

지난 20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안 교수와 김 대표, 최미숙씨, 소재두 논형 대표를 함께 만났다.

“면지에 담은 풍경이나 인물 사진 1천여 점은 보사노바 회원 10여 명이 10여 차례 고향을 샅샅이 답사해 새로 찍었어요. 김 대표는 고향 어르신이나 출향한 지인들한테 먼저 고향 구석구석에 숨은 이야기를 취재한 뒤 답사팀과 함께 현장을 찾아 확인하곤 했죠.”

안 교수는 이번 책을 만들며 이런 깨달음을 얻었단다. “면지는 한국에서 인문학이 지역과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길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석하고 또 그 맥락이 뭔지 보여주는 게 바로 면지 작업이더군요.” 그는 독일 괴팅엔대학에서 로마시대 수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서양고전문헌학자다.

보절 사람 50여명이 만들었다는 ‘면지’를 보면 안 교수 말에 담긴 뜻이 들어온다. 그는 답사팀과 함께 성터 등 보절 곳곳에 보이는 역사의 흔적을 쫓았다. 그의 연구실에는 답사 때마다 하나둘 챙긴 돌멩이가 제법 됐다. “백제 때 보절 땅에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성터 근처에서 가져왔죠. 서울대 고대사 전공 교수한테 보여주며 축성 시기 등에 대해 자문을 받았어요. 보절의 역사를 쓰려고 옛 문헌 40종도 뒤졌어요. <삼국사기>에는 보절에 관해 딱 한 줄이 나와요. 여기에 직접 유물을 발굴하고 마을에 전해내려오는 민담을 붙여 새로운 보절 이야기를 만들었죠.”

면지의 주인공이 지금 고향에 살고 있고 또 고향을 살리는 사람들이란 점도 남다르다. “보통 면지는 큰 산과 큰 강이 먼저 나오고 다음에 면을 빛낸 사람들과 특산물이 나옵니다. 조선 성종 때 나온 <동국여지승람>이 그 기원이죠. 군지는 많아도 읍지나 면지는 드문데 지방자치제 도입 이후 문화사업 차원에서 꽤 나오고 있어요. 제가 확인한 것만 20종(전국 읍·면은 약 1400곳) 정도 됩니다.”

책에서 ‘보절의 마을’편을 보니, 어르신들의 무거운 짐까지 들어 버스에 실어주는 ‘땅꼬마 버스 운전사’ 소태윤씨와 7남매나 둬 학생이 귀한 보절 교육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이경재씨, 타이(태국) 엄마와 보절 아빠 사이에 태어나 이름이 ‘태한’인 보절중 배드민턴 선수까지 마음을 움직이는 보통사람들의 이야기가 풍성하다.

최근 전북 남원 보절면 ‘면지’ 펴내
‘보배와 절의가 숨어있는 보절이야기’
십시일반 기금 모아 3년 걸쳐 작업

고향 살리는 ‘보통사람’ 주인공으로
한국전쟁 좌우 희생자 이름 다 실어
박종철 열사 제수음식 챙긴 사연도

면지는 지금껏 주민들 마음에 상처로 있는 한국전쟁의 비극도 비켜가지 않았다. ‘6·25전쟁과 보절’이란 제목으로, 한국전쟁 동안 지역에서 희생당한 좌·우익 인사 20여명의 명단과 전쟁 당시 생사의 갈림길에서 벌어진 여러 이야기를 채록해 담았다. “지리산 자락인 보절은 인천상륙작전 뒤에도 한동안 낮은 경찰, 밤은 빨치산 세상이었어요. 같은 마을과 집안사람들이 적이 되어 서로 죽였고, 군은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마을 11곳을 불태웠죠. 국가의 비극이 작은 마을을 갈라놓고 서로 죽였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좌·우 희생자를 다 실었어요.”

김하광 대표가 찾아낸 사촌리 사촌마을 당산제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 때 사라진 마을동제의 전통을 생생히 보여준다. ‘사촌마을에서 당산제 음식을 준비할 집이 선정되면 음력 10월부터 집에 금줄을 쳐놓고 다른 지역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또 정월 초하루 아침부터 당산제 모시는 3일 저녁까지 화장실 가는 것도 금했다. 이런 이유로 이 집 사람들은 설날 전날부터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 대가로 동네에서 이 집에 몇 가마니 쌀을 보상해줬다.’

1987년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제삿날 제수를 7년간 챙겼던 ‘보절의 어머니: 성문안댁’ 이야기도 “소소하지만, 시대를 보여주는 보절의 역사”다. 성문안댁 김경임씨는 바로 안 교수의 모친이다. 안 교수가 서울대 언어학과 2학년이던 88년 과대표를 맡아 과 선배인 박 열사의 제사 음식을 준비할 때 서울 연희동에서 떡집을 하던 모친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던 것이다.

제작에 3개월 걸렸다는 그림 지도 ‘보절 12경과 보절의 하트길’ 앞면. 뒷면에는 ‘보절사람’ 양영철씨가 12경을 소재로 지은 한시 12수가 실렸다. “면지 제작에는 보절중 총동창회(회장 박희수, 총무국장 이윤수) 지원이 큰 힘이 됐어요.”(안재원 교수)

면지 편찬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책에 수록할 인물의 기준을 정하는 문제였단다. “기업인을 예로 들면 직원이 20명 정도는 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저는 직원 서너 명을 두고 횟집을 하더라도 좋은 일 하면서 열심히 살면 수록하자고 했죠. 결국 합의를 못 해 1958년생 이후는 다 뺐어요.”

면지는 모두 3천부를 찍어 보절면 전체 880세대와 출향민 500여명에게 한부씩 증정했단다. “300부 정도는 판매도 하려고요. 보절 사람 474명이 십시일반 내서 발간기금 1억7500만원을 모았어요. 남은 기금으로 후원자들한테 보절쌀을 선물로 주려고 해요.”

안 교수는 “수도권에 사는 보절중 출신 동아리 모임이 꽤 활발하다”면서 이런 해석을 곁들였다. “마라톤 모임만 해도 정회원이 40명 이상이죠. 매주 일요일이면 모여 한강을 달립니다. 동아리 모임이 백화점 문화센터처럼 다양해요. 이를 두고 학연이나 지연이라며 봉건적 유산이라고 비판도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런 모습은 씨족 중심의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찾기 힘들어요. 서구 선진국에서 보이는 시민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죠.” 덧붙였다. “제 중학 동창생 250명 가운데 20여명 내외만 대학에 갔어요. 중학교나 고교만 나온 친구들 대부분이 서울이나 경기도 쪽으로 왔죠. 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추적해보면 다 고향과 연결됩니다. 누나가 영등포에서 청과 장사를 하면 그집에 일주일 있다 옆가게에 자리가 생기면 눌러 사는 식이죠. 보절 출신들이 서울에서도 영등포나 강서구 화곡동, 관악구 신림동에 많이 살아요. 남원에서 비둘기호 기차를 타면 영등포가 종착역이었거든요. 그렇게 살다 이제 먹고살 만하니 동창들이 모여 건강도 챙기고 여가생활도 하는 거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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