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top100] EPL 4대 미드필더, 제라드가 최고 중 최고?

조형애 2021. 1. 2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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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UK 편집팀, 에디터=조형애]

<포포투>가 순위 매기기로 돌아왔다. 이번엔 베스트 프리미어리거 톱100이다.

프리미어리그가 1992년 시작되진 않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를 바꾸는 시기였던 바. 기준을 1992년부터 2021년까지로 하고 베스트 플레이어를 꼽았다. 한 세대를 정의한 궁극의 아이콘, TOP10을 공개한다. 10위부터 7위까지 4명은 모두 미드필더다.

폴 스콜스, 파트리크 비에라, 프랭크 램파드 그리고 스티븐 제라드. 이들은 모두 프리미어리그를 주름 잡았다. 누가 가장 잘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포포투>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팬들에게 선수에 대한 짤막한 글을 요청했다.


10 폴 스콜스
ㅣMFㅣ맨체스터유나이티드ㅣ잉글랜드
“스콜스는 최고의 선수, 그 정도가 아니다. 그 세대 최고의 잉글랜드 축구 선수였다. 일생의 한 번뿐인 재능. 그가 스콜스다. 티에리 앙리가 함께 뛰었으면 하고 바란 한 선수가 스콜스였고, 펩 과르디올라 역시 그랬다.

바르셀로나의 전설 차비 에르난데스는 스콜스가 스페인인이었다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안드레스 피를로는 ‘그 세대 진정으로 훌륭한 잉글랜드 미드필더’라 불렀다. 지네딘 지단은 축구 커리어 가장 큰 후회에 대해 스콜스와 함께 뛰지 못한 것이라 했다.

리버풀과 첼시 팬들은 제라드나 램파드가 더 나은 선수여서, 스콜스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왼 측면으로 밀려났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스벤 고란 에릭손 감독은 이렇게 대답하겠지. 셋 중 유일하게 스콜스가 포지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선수였다고 말이다.

제라드와 램파드가 더 많은 득점을 올렸다. 그건 맞다. 하지만 페널티킥으로 얻은 32골을 제라드에게서 걷어내면 88득점밖에 되지 않는다. 스콜스(106) 보다 적다. 램파드에게서도 페널티 스팟에서 차 넣은 43골을 걷어내면, 스콜스와 득점은 비슷해진다. 아스널 팬들은 파트리크 비에라를 이 논쟁에 끌어들일 텐데, 그는 구너에게는 실로 경이로운 선수겠으나 그 스스로도 인정했다. ‘스콜스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선수’라고 말이다.

남은 답은 오직 하나, 스콜스다. 지금까지 난 트로피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 제이미 워드, <유나이티드 스탠드>


09 파트리크 비에라
ㅣMFㅣ아스널, 맨체스터시티ㅣ프랑스
“노스 뱅크 스탠드에서 티에리 앙리 이름이 자주 나오긴 하지만, 아스널 관중들의 진정한 애정 어린 응원을 이끌어 낸 이는 비에라였다. 이탈리아 히트곡 ‘Nel blu dipinto di blu’에 리듬을 맞춘 비에라의 응원가는 하이버리 응원가 인기 순위표에서 가장 높이 있었다.

서포터스들은 비에라를 아스널 역대 최고의 팀 가운데 하나의 상징이라 인식한다. 그리고 그는 그 스스로를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프랑스의 인의 발과 아프리카인의 심장’을 지녔다고.

비에라는 발레리나의 발을 가진 전사와 같았다. 로이 킨과 벌인 셀 수 없는 논쟁, 그리고 ‘가끔’ 발끈하는 성질 때문에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묘사되지만 그런 식으로 기억하는 건 당치 않다. 비에라의 기술을 축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에라는 실크처럼 부드러운 볼 터치 감각을 지닌 선수였다.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새로운 스타 미드필더가 탄생하면 ‘제2의 비에라’로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아스널에도 그렇고, 다른 어떤 팀에도 비에라처럼 우수한 능력이 버무려져 있는 선수는 없었다. 그는 특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 팀 스틸만, <아스블로그>


08 프랭크 램파드
ㅣMFㅣ웨스트햄, 첼시, 맨체스터시티ㅣ잉글랜드
“2003년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첼시를 인수한 뒤, 잉글랜드 축구는 변화했다. 임금과 이적료 폭등은 프리미어리그 지형을 재편했다. 러시아 억만장자가 모든 것을 뒤흔들었던 그때, 램파드는 그대로였다. 비에라, 스콜스 그리고 제라드 개개인의 탁월함을 이야기하다 길을 잃을 수 있지만, 그들이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 외에 진정으로 성취해낸 건 뭐가 있을까?

램파드는 유산을 남겼다. 트로피들과 프리미어리그 177골. 중앙 미드필더에게 기대했던  바를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와 같은 선수들은 스트라이커와 같이 취급된다. 팬, 해설위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지도자들이 8번 선수가 결정타를 때려줄 것이라 기대한다는 거다. 골을 바라는 게, 아니라 요구한다.

비에라가 아스널을 떠나고, 스콜스와 제라드 둘 모두 첼시를 따라잡는 동안에 램파드는 의제를 설정한 셈이다. 사람들이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있다. 그가 리오넬 메시가 차지한 모든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없었다면 메시도 없었을 거다.

그렇다. 난 램파드를 마라도나와 견줬다. 램파드가 없었더라면, 2021년 미드필더의 역할은 매우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비에라, 스콜스, 제라드, 램파드 중 누구인가? 논쟁할 일도 아니다.”
- 게리 헤이스


07 스티븐 제라드
ㅣMFㅣ리버풀ㅣ잉글랜드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잊어버린 게 있다. 제라드가 리버풀에서 절대적인 사랑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커리어 초반, 제라드의 애칭은 ‘스티비 미’였다. 일각에선 제라드를 자기중심적인 선수로 인식했고 혹독한 비난을 가했다. 제라드의 보디랭귀지는 확실히 평판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종종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이마에 주름살이 잡힌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동료 선수들에게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오해받기 쉬운 행동이었다.

‘로컬 보이’ 제라드는 대다수의 다른 동료들보다 훨씬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일이 잘못되면 콥과 같은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난국에 잘 대처했다. 전환점은 2005년 여름이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불과 6주가 흘렀을 때, 리버풀을 배신하는 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제 모리뉴 감독과 첼시 입단에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공황 발작으로 잠 못 드는 밤을 보낸 뒤 깨달았다. 리버풀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제라드와 리버풀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후 의구심은 사라졌다. 첼시에 갔더라면 더 많은 메달을 목에 걸었겠지만, 그 대신 제라드는 리버풀의 아이콘이 되었다. 리버풀은 다른 어떤 것보다 축구를 소중히 여기는 도시다.

실망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지난해 위르겐 클롭이 위업을 달성하기 전에,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제라드는 리그 우승 숙원을 이룬 팀의 구성원이었어야 했다. 2008-09시즌 리버풀은 2위를 차지했다. 5년 뒤엔,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이 거의 손에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제라드는 첼시전에서 미끄러졌다. 그 사건이 그를 괴롭힐 수 있겠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 개인의 실수라기 보다 전술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리버풀을 상징했다. 클럽은 물론이고 리버풀이라는 도시까지도 그랬다. 그는 리버풀의 거대한 인물이다. 제라드는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
- 토니 에반스

그래픽=황지영
사진=포포투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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