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칼럼] 붕괴 과정에 입회하는 나날들-2021년을 맞아

한겨레 2021. 1. 2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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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칼럼]
이런 말이 얼마나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지는 낙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치즘’ ‘홀로코스트’라고 비판했던 척도가 붕괴하고, “나치스 같다”는 비유가 유효성을 잃은 현실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마치 아이히만 같다”는 비판을 받고 부끄러워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이 미쓰, <눈(眼)이 있는 풍경>, 1938년, 캔버스에 유채, 102.0×193.5㎝,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소장.

서경식ㅣ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아, 무너져 버렸다.” “이렇게 무너져 가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매일이다. 세계 전체도, 일본도 지금까지 간신히 유지돼왔던 것이 둑 무너지듯 붕괴돼가는 과정에 내가 입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일본 사회의 모든 국면에서 붕괴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폭발적 감염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으며, 의료 관계자들은 ‘의료괴멸(붕괴)’이라는 현실 앞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공허한 정신론을 거듭 읊조리고 있을 뿐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부패 의혹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 말할 뿐 책임은 비서에게 떠넘기고 증거자료 제출을 거부하면서 “설명할 책임은 다했다”며 당당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후계자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취임하자마자 단행한 것은 일본학술회의 회원 6명에 대한 임명 거부였다. 지금까지도 정부는 임명 거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는 학술에 대한 무지와 멸시의 발로일 뿐 아니라 질의응답이 아무 소용없는 강권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코로나 대책에서도 한편으로 거액의 국비를 들여 여행과 외식을 장려하는 정책을 고집하다가, 감염자가 늘자 ‘스테이 홈’, ‘자숙’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미 병상은 거의 들어차, 자택 대기 중 사망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사회 전역에서 뭔가 급속히 붕괴하고 있다. 그 뭔가란 단적으로 복지나 보건제도, 교육제도를 포함한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제도를 가리키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전제로서 존재해야 할 (그렇게 상정돼 있는) 사실에 대한 실증, 말에 대한 신뢰가 붕괴하고, 지성과 이성이 붕괴한 것이다. 따라서 사실 인식과 논리의 공유가 토대를 이루는 대화와 논의 자체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에는 도쿄 시부야구 버스정류장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성 노숙자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졸지에 근처 남성에게 맞아 죽었다. 갖고 있던 돈은 8엔이었다. 오사카에서는 고령과 중년의 모녀가 소리 없이 굶어 죽은 채 발견됐다. 냉장고는 비었고 수도와 가스는 끊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지니고 있던 돈은 13엔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런 뉴스가 별다른 놀라움도 없이 유통되고 있다. 사회적 약자는 점점 쫓겨 못 본 체 내버려지고 있다.

약 9개월 전 코로나 재난이 본격화할 무렵 나는 ‘죽음의 승리’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대재앙’이란 역병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자기중심주의와 불관용 기운이 만연하고, 파시즘이 대두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역병이나 자연재해로 인간은 삶과 목숨을 빼앗기지만, 실은 인간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한겨레> 2020년 4월10일치)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예감은 적중한 듯하다. 그것을 보여준 것이 미국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소란이다. 조 바이든 후보가 가까스로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저지했으나, 트럼프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발버둥 쳤다. 그것을 미국민 절반 가까이가 지지했다. 컬트적인 음모론까지 퍼뜨리면서.

1월6일에는 의회에 트럼프 지지자 무리(폭도)가 난입해 5명이 숨지는 전대미문의 사태도 벌어졌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11월27일치 칼럼에서 나는 “미국의 ‘단말마’는 계속된다”고 썼다. ‘트럼프’가 아니라 ‘미국의 단말마’다. “미국은 분단과 쇠퇴의 길로 착실히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말마는 길게 이어지면서 많은 부패와 파괴를 거듭하며 심대한 손상을 인류사회에 안겨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미국이 쇠퇴하면서 스스로 무너지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말마’의 희생을 당할지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붕괴되고 있는 것은 단지 ‘미국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 2차대전 이후 극히 불충분하지만, 어쨌든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보편적인 가치는 누구도 공공연하게 무시할 수 없는 공통의 척도로 인정돼왔다.(세계인권선언, 1948년) 70여년이 지난 지금 그런 기본적인 척도 자체가 붕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일본 사회는 거짓말이나 속임수가 부끄러움도 없이 횡행하는 사회, 대화나 논의가 성립되지 않는 디스토피아가 돼가고 있다.

미국 대선을 둘러싼 저간의 혼란과 관련한 많은 뉴스를 봤지만 특히 흥미 깊었던 것은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투고한 동영상이다.(1월11일 ) 그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을 1938년 독일 나치스가 유대인을 박해하기 위해 저지른 ‘수정의 밤’에 비유했다.

1947년 오스트리아 태생의 슈워제네거는 “나는 역사상 가장 사악한 정권에 참여한 죄책감을 술로 달래려는 망가진 남자들에 둘러싸여 자랐다”며 “쓰라린 기억이어서 별로 공개한 적은 없지만, 아버지는 1주일에 한두번은 술에 취해 귀가한 뒤 고함을 치며 우리를 때렸고, 어머니는 겁에 질렸다”고 했다. 붕괴하고 있는 공통의 ‘척도’가 그에게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이런 말이 얼마나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지는 낙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치즘’ ‘홀로코스트’라고 비판했던 척도가 붕괴하고, “나치스 같다”는 비유가 유효성을 잃은 현실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마치 아이히만 같다”는 비판을 받고 부끄러워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21년을 맞아 소개하려는 그림은 일본 화가 아이 미쓰(1907~1946)의 대표작 <눈(眼)이 있는 풍경>(그림)이다. 1938년에 그렸다.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과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이듬해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고 독일에선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가 일어난 해다.

아이 미쓰는 다른 많은 화가들과는 달리 전쟁화를 그리지 않았다. 1944년 소집돼 일개 병졸로 중국에 파견됐다. 우창(武昌)에서 패전을 맞았으나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패전 5개월 뒤 귀국하지 못한 채 전장의 병참병원에서 사망했다. 패전 뒤였는데도 전쟁 중의 군대 질서가 온존하던 그 병원에서 상관의 반감을 사 ‘절식(絶食)요법’이라는 명목으로 아사당했다. <눈이 있는 풍경>의 중앙에 빛나는 눈은 그런 무참한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번 학기 수업시간에 이 작품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더니 예년과는 다른 반응이 있었다. 현재라는 시대의 불안에 가득 찬 공기가 약 8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학생들의 감수성을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학기로 나는 이 대학을 정년퇴직한다. 마지막 수업을 이렇게 끝내게 됐다. ‘척도’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게 안되더라도 어떻게든 이 ‘눈’처럼 세상 되어가는 꼴을 최후까지 지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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