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설가의 무모함에 대하여

하명희 2021. 1. 2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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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내 책상에는 이런 책들이 남아 있다.

코로나19 시대에 누군가는 사진기를 들고 텅 빈 도시를 기록하고(〈별빛이 떠난 거리〉), 또 누군가는 봉쇄된 도시에서 매일 일기를 쓴다(〈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어느 출판사는 다른 도시에서 온 노동자들의 시를 던지고(〈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오랜 시간 누적된 우정으로 번역된 시집도 있다(〈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제는 돌봄과 간병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만들자며 손을 내밀기도 하고(〈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또 누군가는 풍경과 상처의 시간을 예술로 끌어안는다(〈풍경의 깊이〉). 시집과 사진, 그림과 기록들 사이에서 김남일의 〈어제 그곳 오늘 여기〉를 꺼내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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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내 책상에는 이런 책들이 남아 있다. 코로나19 시대에 누군가는 사진기를 들고 텅 빈 도시를 기록하고(〈별빛이 떠난 거리〉), 또 누군가는 봉쇄된 도시에서 매일 일기를 쓴다(〈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어느 출판사는 다른 도시에서 온 노동자들의 시를 던지고(〈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오랜 시간 누적된 우정으로 번역된 시집도 있다(〈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제는 돌봄과 간병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만들자며 손을 내밀기도 하고(〈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또 누군가는 풍경과 상처의 시간을 예술로 끌어안는다(〈풍경의 깊이〉). 시집과 사진, 그림과 기록들 사이에서 김남일의 〈어제 그곳 오늘 여기〉를 꺼내 펼친다.

하루에 한 장씩 아껴 읽었는데, 책을 덮고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책 속의 도시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그 도시들을 30년의 시차를 두고 기웃거리며 길을 찾는 한 소설가가 떠오르는가 하면, 찾으려고 하는 것들이 가방에 가득 들어 있으면서도 그걸 메고 자꾸 사이공에서 교토로, 상하이에서 다시 교토로, 타이베이에서 하노이로, 오키나와로 떠나는 사람이 보였다.

그가 돌아다닌 곳들은 어제의 그곳이면서 오늘의 여기, 아시아다. 그 아시아의 문학을 나는, 우리는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그는 우선 국내에 번역된 아시아 문학 목록을 작성한다. 책에서 밝히길 비매품과 교지 번역본까지 다 따져도 1300여 편, 그중 중복과 이것저것을 빼면 ‘근대 100년간 최소 마흔다섯 개 이상 나라를 대상으로 이 땅에서 출판한 모든 작품의 양’이 단편소설을 포함해 1000여 편도 안 된다고 한다. 그는 이게 ‘우리의 아시아’라고 단언한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이상한 오기가 끓어올랐다. 그가 만든 아시아 근대문학 목록만 받아 적기에도 벅찬데, 그는 아시아의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지역, 역사적 맥락, 지금 그곳의 흔적까지 다시 훑고 있으니 그 무모함에 질투와 애정을 느낄밖에. ‘아시아의 고아’라고 통칭되는 한 인물이 근대에서 지금 여기 서울에 막 도착해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어제와 오늘 사이 백 년의 시간과 도시들을 오가며 그곳과 여기를 이어놓고 있었다.

코로나 시대의 단절이 주는 시공간에서 백 년의 시간과 아시아의 다른 곳을 상상하는 일, 책 속엔 근대인이 있고 근대도시가 있었는데, 책을 덮을 때 나는 지금 이곳의 문학을 묻게 된다. 아시아의 근대를 읽는 건 오늘과 여기를 이해하는 지도였구나. 한 선배 작가의 발과 손과 머리를 거친 이 정직한 무모함은 문학의 자리,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하명희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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