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영어판 번역 논란, 페미니즘 관점서 새로 봐야"
윤선경 교수 "번역은 권력에 저항할 수도 있는 정치적 공간" 젠더학>
한강 <채식주의자>의 영어판 번역이 원작의 주제 의식인 한국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을 잘 살려낸 좋은 번역이라는 내용의 논문이 최근 국제 학술지에 등재됐다.
21일 한국외국어대학교는 보도자료를 내어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문학번역 전공) 윤선경 교수의 논문 ‘데버러 스미스의 불충실성 : 페미니스트 번역으로서의 <채식주의자>’가 국제 저명 학술지 <젠더학 저널>(Journal of Gender Studies)에 지난 12월21일 등재됐다”고 밝혔다. 이 논문은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의 <채식주의자> 영어판 번역이 명백한 오역 일부를 제외하면 소설가 한강의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학)적 주제의식을 잘 살린 번역이라는 내용이다. 이 논문을 쓴 윤선경 교수는 “단어를 일대일로 옮기는 충실성에 기반한 번역을 선호해온 한국에서 스미스의 번역이 비판을 받았지만, 원작을 영어 사용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재탄생시켰다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앞서, 소설 <채식주의자>(2007)의 영어판 번역은 2016년 맨부커상 수상 이후 한국에서 ‘오역이 지나치게 많다’, ‘원작을 제멋대로 다시 썼다’ 등의 논란이 일었다. 2018년 초 데버러 스미스는 스스로 오역 60개를 인정하고 고쳤다. 이 오역 논쟁에 대해 원작자 한강은 2018년 언론 인터뷰에서 “역자의 한국어가 아직 서툴다는 것을 느꼈지만, 도착어인 영어 표현이 좋아서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작품을 전달하는 데 결정적 장애물이 된 것은 아니다”라고 의견을 낸 바 있다.
한국외대에서 ‘번역과 젠더’를 강의하는 윤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번역은 순수하고 중립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권력에 봉사할 수도 저항할 수도 있는 정치적인 공간”이라며 “1980년대 캐나다 퀘벡에서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태동한 ‘페미니즘 번역’은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에 반대하면서 가부장적 언어에 억압된 여성의 목소리를 일깨우고자 번역을 원본의 베껴 쓰기로 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논문의 내용을 보면, 원작에서 성별을 특정하지 않을 때 데버러 스미스는 젠더 고정관념을 깨는 번역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소설 속 의사와 간호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의사를 여성(she)으로, 간호사를 남성(he)로 번역한다. 채식주의자인 주인공 영혜가 원작에서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형제 같다”고 말하는 장면은 영어판에서 한국어 ‘형제’가 ‘형제와 자매’(brother and sister)로 번역된다.
이외에도 데보라 스미스는 원작의 주제의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등장인물을 다소 변형한다. 윤 교수는 논문에서 “원작에서 주인공 영혜의 남편과 언니 인혜의 남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부장적이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데, 스미스는 (내용의) 추가와 변형을 통해 두 남편의 남성중심적 태도를 강조한다. 또한, 원작의 인혜는 자신을 탓하고 남편을 이해하며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스미스는 인혜의 흔들리는 순간을 최소화하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바꾼다”고 설명했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영어판에 대해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국내 문학계에서도 나온다. 문학연구자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번역 중 명백히 오역인 것은 수정돼야 하지만 원작에 담긴 페미니즘 메시지를 풍부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번역자가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좋은 태도”라고 평가했다. 이어 김 교수는 “페미니즘 서사에 대한 평가가 낮은 한국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는 2007년 발간 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2016년 맨부커상 수상을 통해 세계 문학 시장에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도 재평가 됐다”고 말했다.
한편, 등장인물을 변형시키는 큰 개입은 번역에서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일부 있다. 출판계 현업 번역가 ㄱ씨는 “남성은 반말, 여성은 존댓말, 이런 식의 번역은 물론 지양해야 하지만 작품의 캐릭터를 변형시킬 정도로 적극적인 개입은 원작의 훼손으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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