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레슬링의 양정모와 서울 올림픽 금메달 한명우'[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며칠 전 필자는 서울 모처에서 88 서울올림픽 레슬링 82kg급 금메달리스트인 한명우 선배와 전 KBS 스포츠 방송국 송전헌 부사장과 함께 오찬을 함께하며 담화를 나눴다.
KBS 레슬링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한명우는 1984년 LA올림픽에 복싱의 문성길과 함께 동반 출격 동반 탈락 나란히 패잔병(敗殘兵)으로 전락해 상심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홍도에 동반여행을 떠났다가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던 한명우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삭히지 못하고 물속으로 몸을 던지자 곁에 있던 문성길이 득달같이 뛰어들어 구출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혈맹(血盟)관계로 급진전되면서 시나브로 필자와도 자연스럽게 친분이 두터워졌다. 1956년 11월 12일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인 충남 당진 출신의 한명우, 굴곡이 심한 롤러 코스터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적어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기 이전까지는...
79년, 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지만 메달권에서 탈락,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25세의 한창나이에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 시절 올림픽을 보이콧하면서 불참,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74kg급에서 국가대표로 발탁, 실추된 명예를 설욕하려 출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진원의 유명세(?)에 밀려 탈락한 흑역사(黑歷史)의 이력으로 점철된 레슬러 한명우는 84년 LA올림픽에 출사표(出師表)를 던지며 출전한다. 당시 29세의 한명우 입장에선 분기점(分岐點)이었기에 구창모의 '아픔만큼 성숙해지고'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모든게 끝난 것'같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절치부심(切齒腐心)한 한명우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올림픽을 향한 예열(豫熱)을 마친 후, 2년 후인 1988년 힘이 용솟음치는 맷트에서, 투기 종목 선수로 활약하기에는 환갑 진갑 다 지난 33살의 나이에 선발전에 출전, 5년 후배인 천하장사 오효철(주택공사), 10년 후배인 물찬 제비 이동우(한국체대) 등 신진들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표팀에 극적으로 승선한다. 낙타가 바늘을 뚫고 지나는 것 이상으로 힘겨운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한명우는 24명이 출전한 본선 4차전에서 이토의 머리에 부딪쳐 이마에 8바늘을 꿰매는 접합수술을 받는 핸디켑에도 불구하고 노장 투혼을 발휘, 88년 10월 1일 87년 세계 선수권자인 터키의 네스미 겐 칼프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피 맺힌 붕대는 오랫동안 한명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출전 당시 동메달도 쉽지 않았던 그는 새로운 역사(歷史)를 창출하면서 일본 체육잡지 넘버에서 선정한 대회 MVP에 수영 5관왕인 동독의 오토를 제치고 수상, 드라마틱한 감동을 선물했다.
이런 이력을 지닌 한명우 선배와 대화를 나누면서 필자는 그에게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에 관해 직업상(?) 깊은 관심을 표하면서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이런 필자에게 한명우 선배가 친절하게 화답을 해주면서 대한민국 스포츠역사에서 최초라는 상징성이 묻어난 양정모 선수에 관한 글이 탄생하게 되었다.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탄생을 분기점(分岐點)으로, 기원 전후(前後)가 나뉘듯이 한국 스포츠는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 이전과 이후로 고대(古代)와 현대(現代)의 두 개의 판이 형성될 정도로, 양정모라는 이름 석 자는 대한 체육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런던 올림픽에 첫 출전, 이후 28년 만에 나온 양정모의 첫 금메달은 향후 LA 올림픽부터 지난 2016년 리우 올림픽까지 32년 동안 무려 89개의 금메달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트리거(Trigger) 역할을 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전까지, 1956년 멜버른 대회에서 복싱의 송순천이 1964년 동경대회에선 레슬링의 장창선과 복싱의 정신조가, 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선 복싱의 지용주 그리고 72년 뮌헨 대회에선 오승립(유도)이 이글이글 끓는 구리 항아리 속에서 맨손으로 뜨거운 금메달을 잡았다가 꺼내기 일보직전에 놓쳐 분투를 삼켜야 했고 그 밖의 8명의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했을 뿐 금메달이란 대어(大漁)는 좀처럼 낚이지 않았다. 손 안에 들어왔다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금메달이란 이름의 불가사의( 不可思議)는 1976년 8월 1일 오전 9시 45분 몬트리올에서 피와 땀 눈물로 전취(戰取)한 양정모에 의해 결국 도피생활 28년 만에 포획됐고, 포획한 금메달을 높이 치켜든 손 높이만큼 한국의 국제적 지위와 한국민의 긍지도 치솟은 천금(千金) 같은 메달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복싱의 염동균이 부산 구덕 실내체육관에서 펼쳐진 WBC 슈퍼 밴텀급 챔피언 리야스코에게 도전, 일방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판정이 뒤집어지면서 분패했던,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희비 상곡선(喜悲 雙曲線)을 그린 그런 날이었다. 그의 금메달은 광복 이후 런던 올림픽을 시발로 8차례 올림픽에 출전하여 뽑아 올린 금맥(金脈)이었다. 양정모는 5전 전승으로 예선을 통과해 3명이 대결하는 결승 리그에 올라 미국의 진 데이비스와 몽고의 오이도프와 금메달을 놓고 운명의 3파전을 벌인다. 미국의 데이비스는 오이도프에 판정승을 거뒀고, 양정모는 이런 데이비스에 폴승을 거두고 오이도프 전을 앞둔 상황에서 희미하게나마 금메달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양정모는 복싱에 비유하면 인파이터 형(形)이다. 그래서 달려든 타입의 미국 레슬링은 속칭 양정모의 밥이었다. 데이비스는 그만 달려들다 양정모의 카운터에 걸려 허무하게 KO패(폴패)를 당해 양정모의 메달을 향한 진군(進軍)에 희생양이 되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국내 선발전에서 양정모와 두 차례 맞대결한 한명우 선배의 전언(傳言)이다.
한명우는 '양정모 선배는 다소 부족한 스피드에도 생고무처럼 유연한 신체에서 분출(噴出)되는 지구력과 끈질김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레슬링에 특화(特化)된 선수'라 표현했다. 1976년 8월 1일 벌어진 오이도프와 대결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과 1975년 민스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각각 1승 1패를 주고받은 양정모의 심정은 자못 비장했다. 마치 일본 전국시대 말기 최고의 검객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뤘던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처럼 말이다. 3년 연속 메이져 대회에서 맞붙는 두 레슬러의 얄궂은 운명의 장난은 과연 누가 만든 것인가? 양정모는 폴패나 6점차 이상으로 패하지 않는 한 금메달을 목에 걸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서 촌치의 틈도 없는 3라운드 9분간의 사투에서 8-10 판정패, 총 벌점 3을 기록해 데이비스에게 1차전 판정패한 전적 때문에 벌점 4점을 안게된 오이도프와 양정모에 폴패를 당해 벌점5점을 기록한 데이비스를 2-3위로 밀어내고 대망의 금메달을 끌어안았다.
양정모는 전투(戰鬪)에는 졌지만 전쟁(戰爭)에는 승리함으로써 건국 이후 최초의 월계관을 쓴 주인공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아쉬운 점은 복싱에서 외교력만 발휘했어도 양정모 선수와 함께 금메달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복싱 라이트 플라이급에 출전한 박찬희였다. 당시 동아대 1학년 학생으로 한영고 2학년 때인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금메달, 76년 제2회 태국 킹스컵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박찬희는 8강에서 쿠바의 에르난데스에 3-2로 분투를 삼켰고 결국 에르난데스는 금메달을 획득했다. 박찬희가 패한 7월 28일 그날은 밴텀급의 황철순이 미국의 찰스 무니에게 2-3으로, 페더급의 최충일은 멕시코의 파라데스에 1-4로 패해 72년 뮌헨 올림픽에 이어 2회 연속 올림픽에서 노메달에 그친 통곡의 날이 됐다. 여담이지만 최충일은 양정모와 같은 부산 한일종합체육관출신 이었다, 이를 유추해 보면 역시 올림픽의 정상 정복은 제우스 신(神)의 허락 없이는 등정할 수 없는 오묘한 자리인가보다.
사람들은 누구나 최초이자 최고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최고는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최초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역사는 최초의 기록들을 모은 것인지도 모른다. 목숨을 걸고 최초의 북극점에 도달한 피어리, 남극점을 처음으로 정복한 아문센, 에베레스트 산을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처럼 최초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최초라는 기록은 최고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북한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남자 사격 50m 소총복사에서 리호준이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했고 복싱에선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밴텀급에서 구영조가 북한의 첫 금메달을 획득해 한국보다 최초의 금메달에선 한 발 앞섰다.
양정모는 금메달 획득으로, 체육인 최초로 청룡장을 수여받았고, 김택수 대한 체육회장이 이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약속한, 자비로 지급한 5천만원의 격려금과 체육 유공자에게 주는 연금(월12만원)을 받게 됐다. 이밖에도 각계에서 들어오는 성금 등을 합하면 양정모는 물경 약 1억원 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당시 체육회 관계자는 말했다. 그뿐 아니라 양정모는 체육인으로서 최초로 병역상의 특혜가 주어지면서 군 면제 수혜자가 되었고, 더불어 그의 올림픽 금메달을 기폭제로 이듬해 한국체육대학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양정모의 금메달이 없었다면 한국체육대학 탄생도 없었다. 이쯤 해서 한국체대 졸업식 때는 한번쯤 양정모 선수에 대한 감사의 묵념도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양정모는 1953년 2월 부산태생으로 부산 건국중 2학년때 부산 한일종합체육관에서 레슬링을 시작, 고교 3학년 때인 70년 제51회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1972년 뮌헨 올림픽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입상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대표단에서 탈락하는 쓴맛을 보고 슬럼프에 빠져 73년 테헤란 세계선수권대회에 선발전에서 탈락하는 부침(浮沈)을 겪는다.
이후 74년 동아대 졸업 후 조폐공사 팀의 창단멤버로 스카웃된 후 실력이 급상승, 그해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숙적 몽골의 오이도프를 꺾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다. 오이도프는 제7회 아시아대회 직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열린 세계 레슬링 선수권 대회 자유형 페더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로 양정모는 이런 탑독의 오이도프와 맞대결, 8-7 야구의 케네디 스코어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금메달은 1966년 토레도(미국) 세계 레슬링 선수권 대회 자유형 52kg급에서 장창선이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8년 만에 일궈낸 국제대회 금메달이었고, 아시아 경기 대회 출전 24년 만에 걷어 올린 첫 쾌거(快擧)였다. 탄력을 받은 양정모는 74년 12월부터 76년 3월까지 4차례 미국과 일본 전지훈련을 통해 다양한 기술을 습득, 결국 세계의 두터운 벽을 뚫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6년 금메달을 획득할 때 25살의 혈기왕성한 새파란 청년 양정모도 이제 칠순의 노신사로 변모할 만큼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속에 스포츠 변방국(邊防國) 한국도 스포츠도 세계 10대 강국을 넘나드는 나라로 탈바꿈됐고 그 중심엔 양정모의 금메달이 변곡점(變曲點) 역할을 독톡히 했다. 양정모-한명우 두 레슬러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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