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클래식] '원더우먼 1984′에 흐르는 오페라 아리아는

김성현 기자 2021. 1.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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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 우먼 1984

1차 세계 대전에서 공군 파일럿으로 활약했던 전쟁 영웅의 면모는 온데간데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사에 서툰 철부지 개구쟁이에 가깝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원더우먼 1984’에서 원더우먼의 연인으로 나오는 공군 대위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가 나오는 장면이야말로 ‘깜짝 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년 전의 전편 ‘원더우먼’에서 트레버 대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영웅적 희생을 했지요. 이번 후속편에서는 60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1984년의 미국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설정됩니다. 1차 대전의 전쟁 영웅이 냉전 말기의 레이건 시대로 돌아왔으니 적응하기 힘든 건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도, 길거리의 브레이크 댄스를 볼 때도 아이처럼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입니다. 거리 예술과 쓰레기통을 구분하지 못하고, 우주선을 상상하기 힘든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어쩌면 2021년의 우리가 2080년으로 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지요.

트레버 대위 역의 크리스 파인

이렇듯 1980년대 시대상에 트레버 대위가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난데없이 오페라 아리아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바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2막에 나오는 아리아 ‘사랑의 괴로움을 그대는 아는가(Voi Che Sapete)’입니다.

이 아리아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왕성한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뭇 여인들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고백하고 다니는 10대 사춘기 소년 케루비노의 노래입니다. 오페라 2막에서 흠모하는 백작 부인 앞에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라면서 들려주는 일종의 연가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랑이 무엇인지 아시는 그대여, 부인, 제 마음도 보이시나요. 도무지 알 수 없는 제 감정을 말씀드리지요. 즐거움과 비참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야릇한 감정으로 가득하지요.”

흥미로운 건 오페라에서 케루비노가 연정을 표현하는 대상이 비단 백작 부인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녀들에게도 연신 추파를 던지면서 그야말로 온통 무대를 휘젓고 다니지요. 신분과 성별에 따른 갈등 코드가 숨어 있는 이 오페라에서 케루비노는 끊임없이 웃음을 불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이에 앞선 오페라 1막에서 참다 못한 알마비바 백작은 케루비노에게 군대에 입대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하인 피가로가 고소하게 여기면서 놀리는 아리아가 유명한 ‘나비야 다시는 날지 못하리(Non piu andrai)’입니다. 쉽게 말해서 ‘용용 죽겠지. 쌤통'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비롯한 최근 무대에서는 케루비노를 큐피드와 같은 사랑의 꼬마 천사로 묘사하기도 하지요.

영화에서 흐르는 이 아리아는 트레버 대위가 더 이상 전편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골칫덩이이자 사고뭉치로 전락했다는 일종의 암시입니다. 원더우먼이 곁에서 돌봐주고 챙겨야 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지요. 원더우먼은 세상을 구하기도 벅찬 노릇인데 커다란 철부지가 생겼으니 단단히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번 속편에서 가장 재치 있는 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전편에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던 건 원더우먼이었지요. 여전사들만 살고 있는 신화의 섬에서 1차 대전의 전장으로 뛰쳐나온 원더우먼은 한동안 적응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 원더우먼을 보살피고 돌봤던 존재가 바로 트레버 대위였지요. 속편에서는 남녀의 처지가 뒤바뀐 셈입니다. 과연 원더우먼은 세상과 연인 중에서 누구를 구해야 하는 걸까요. 이처럼 영화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난처한 상황을 넌지시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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