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하게 기괴하게..청년 작가들, 화두를 던지다

노형석 2021. 1. 2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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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새해 눈에 띄는 청년작가 기획전]
교회 예배당을 개조한 공간에 차린 ‘수행하는 회화’전 출품작들. 안쪽의 옛 설교단 공간에 이우성 작가의 걸개그림 연작 3점이 내걸렸다.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발산했던 1980~90년대 걸개그림과 달리 일상의 사적인 경험과 기억, 몽상 등을 풀어낸 사적인 그림 매체로 표현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바닥에 놓인 작품은 최선 작가의 <그리지 않은 회화(부작 회화)>. 녹슨 못들을 여기저기 겹쳐 놓은 흔적들로만 이뤄진 그림이다.

“우리는 195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조각품과 그림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전시장 앞에서 청년작가들은 다소곳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1960년대 뜨거운 앵포르멜 추상 그림과 70년대 단색조 그림을 그린 박서보, 하종현 작가를 비롯해 김창열, 윤명로, 김종학, 곽인식, 서승원님 같은 대선배의 작품들이 우리 신작의 영감과 재료가 됐습니다.”

전시장엔 40~50년 전 한국 현대 미술사와 과거의 명작을 소재로 만든 신작이 빼곡했다. 한국과 외국 미술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이 된 70년대 단색조 그림(모노크롬)이 허접한 입체 조형물로 변신해 있었다. 화면에 줄만 죽죽 그으며 수행의 흔적이라고 강조해온 박서보의 대표작 <묘법>은 화폭 거죽이 튀어나온 배불뚝이 그림이 됐다. 화면 뒤쪽에서 물감이 배어 나오는 하종현 작가 특유의 그림은 석고 덩어리가 꾸역꾸역 삐져나오는 기둥 조각으로, 최만린의 먹 드로잉은 철과 스테인리스 조각이 얽힌 폐철 더미 같은 조형물로 탈바꿈했다.

김세중미술관에 펼쳐진 기획전 ‘맞붙다’의 ‘광장’ 섹션 전시장. 1960년대 국내 화단을 휩쓴 앵포르멜 추상화의 에너지와 열기를 흘러내리는 뒤엉킨 이미지의 스티로폼 조형물로 형상화한 오은 작가의 작품이 바로 앞 정면에 보인다. 그 옆과 뒤의 다른 작품들도 한국 현대 미술사의 주요 작품들이나 흐름을 주된 소재로 삼아 만든 조형물과 그림들이다.

대체 이 전시는 무슨 의미일까. 지난 12일부터 서울 숙명여대 근처 김세중미술관에서 131점의 구작과 근작들을 모은 전시 ‘맞붙다(Against)’(31일까지)를 열고 있는 곽인탄, 김영재, 심은지, 오은 작가와 홍예지 기획자는 한국 현대미술의 유산에 대한 애증 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전시라고 했다. ‘밀실’ ‘광장’ ‘천사’란 세 영역으로 나뉜 전시의 열쇳말은 ‘참조’다. 과거 국내 대가들의 유산에 영향을 받은 청년작가들의 작업을 방의 형태로 구현한 공간 속에 잔뜩 채워 넣고, 이를 기괴한 모양의 덩어리나 스탠실 기법의 회화 등으로 재현한 작업을 보여준다. “극복해야 하면서도 결국은 참조하고 계승할 수밖에 없는 한국 모더니즘 미술과 지금 청년작가의 숙명을 이야기하는 전시”라는 게 홍예지 기획자의 설명이다.

윤민화 기획자, 최태훈 작가의 2인전 ‘트랙터’ 전시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마네킹이 최 작가의 설치작품 <중력↔장력>. 플리스 점퍼를 입은 마네킹은 몸체 곳곳이 기와 힘의 흐름을 담은 그라피티로 덮여 있다. 뒤쪽에 보이는 마네킹은 또 다른 설치작품 <관성↔저항>이다.

코로나로 얼어붙은 미술판에 독특한 콘셉트와 틀거지로 무장한 젊은 기획전이 연초부터 쏟아진다. ‘맞붙다’전 외에도 수행과 같은 궤적을 걷는 소장 작가의 창작 과정을 보여주는 서울 성북구 동선동 대안공간 디스이즈낫어처치의 4인 기획전 ‘수행하는 회화’전, 사물과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힘과 방향을 포착한 서울 서초구 서초동 페리지갤러리 ‘윤민화·최태훈 2인전’, 금천구 공단지구의 시공간을 현대미술로 풀어낸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의 4인 기획전 ‘속도와 무게의 균형’ 등이다. 미숙한 인큐베이터 전시가 아니라 동시대 화두를 고민해 만들어낸 양질의 기획전이라 올해 미술판의 좋은 전조로 비친다. ‘수행하는 회화’전(31일까지)은 예배당을 개조한 공간에 튀는 수행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림이 널려 있는 얼개다. 눈길을 붙드는 작품은 옛 설교단에 걸린 이우성 작가의 걸개그림 연작 3점과 그 아래 펼쳐진 최선 작가의 흐르는 그림, 김도연 작가의 긁어낸 그림이다. 사회적 메시지를 발산했던 1980~90년대 걸개그림과 달리 이 작가의 걸개그림은 친구들과의 장난이나 동성·이성의 키스 장면 등을 묘사한다. 일상의 사적인 경험과 기억, 몽상을 표현했는데, 설교단을 뒤덮은 배치가 발칙하다. 최선 작가의 <그리지 않은 회화(부작 회화)>는 녹슨 못을 여기저기 겹쳐 놓은 흔적으로 회화를 구성하거나, 마르지 않고 흐르는 실리콘 오일 안료로 파란빛, 빨간빛의 단색조 화면을 꾸려 모더니즘 단색조 회화의 경직성, 무미건조함을 풍자한다. 김도연 작가는 유리 재질의 폴리카보네이트 판에 피부염으로 고통받는 체험을 이입한다. 칼로 긁어낸 선묘로 벌레나 기묘한 형상을 새기면서 기억, 체험, 감각이 어우러진 수행 회화를 완성했다.

서울 독산동 공단지구 노동자 숙소를 리모델링한 ‘예술의 시간’에서 선보이고 있는 ‘속도와 무게의 [ ] 균형’ 전시장 일부. 사진은 김상현 작가의 설치작품이다. 공단에서 쓰다가 퇴역한 액압 프레스 기계 실물을 오브제로 전시장에 들여왔다. 기계 뒤쪽 벽에는 프레스 기계의 모습을 공단의 생산물인 스테인리스 판에 여러 색깔로 그린 정물 이미지를 함께 배치해 지금까지 흘러온 공단의 시간들을 반추하게 한다.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 차려진 윤민화 기획자, 최태훈 작가의 2인전 ‘트랙터’(2월6일까지)는 기성복이나 기성품의 표준 치수로 사물의 크기를 재단하는 관성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 작가는 마네킹을 전시장 곳곳에 거꾸로 매달거나 박차는 듯한 형상으로 배치하고 그들의 몸과 벽면 바닥에 기와 힘의 흐름을 담은 그라피티를 덧입혀 보이지 않는 힘의 흐름을 포착했다.

서울 독산동 공단지구 노동자 숙소를 리모델링한 문화공간 ‘예술의 시간’에서 선보이고 있는 ‘속도와 무게의 [ ] 균형’전(3월27일까지)은 이 공단에서 퇴역한 프레스 기계를 오브제로 들여왔다. 프레스 기계의 모습을 공단의 생산물인 스테인리스 판에 그린 정물 이미지와 함께 배치해 과거 공단의 시간을 반추하게 하는 김상현 작가의 설치작품이다. 유비호 작가의 영상작업은 전통 종에 무늬 주물을 접붙이는 장인의 손길에서 노동의 숭고한 본질을 잡아낸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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