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말하기] 붉은 원형 무대의 기억, 베자르의 '볼레로'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 2021. 1.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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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안무가는 평생 몇 작품이나 남길 수 있을까. 2세 때 무용에 입문해 80평생 무용만을 위해 살았던 모리스 베자르는 26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2007년 타계하기 전까지 다작(多作)하며 열정적이었던 그는 대중성이 미약한 순수무용의 흥행을 주도한 미다스 손이며, 디아길레프에 비할 만큼 흥행사로도 유명하다. 수많은 작품 중 1961년 발표한 ‘볼레로’는 베자르를 현대 발레의 혁명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한 명작이다. 순수한 춤에 불어넣은 극적 요소, 음악적 감수성과 분석력은 6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관객에게 끊임없이 관심과 가치를 두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

‘볼레로’는 스페인 민속 춤곡으로 라벨에 의해 1928년 춤곡으로 만들어졌는데, 19번이나 같은 주제가 반복되며 크레셴도의 구조를 가진 특징적인 음악이다. 베자르는 이 춤곡을 혁신적인 남자무용수 중심의 안무로 완벽하고 스펙터클하게 만들어냈다. 관객들에겐 삶에 대한 질문과 숙제를 던졌다. 이후 유명 무용수들이 앞다퉈 솔로 버전을 발표했는데 특히 20세기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였던 조르주 돈의 연기가 돋보였다. 미세하게 시작해 점차 증폭되어가는 음악적 양감(量感)을 신체의 부분 움직임에서 시작해 점차 확대되고 추가되어가는 ‘미장센’을 통해 관능적인 움직임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처음 ‘볼레로’를 접한 것은 TV 미니시리즈였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라는 시리즈물인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루돌프 누레예프, 글렌 밀러, 에디트 피아프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기구한 가족사를 그려낸 프로그램이다. 에펠탑 2층에서 라벨의 ‘볼레로’를 두 오페라 가수가 부르기 시작하고 건너편 샤이오 궁전 마당에 붉은 원형 무대가 설치되어 베자르의 ‘볼레로’가 삽입되었다. 이 장면은 20세기 유럽사를 응축해서 표현한 최고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며 그의 작품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지금 우리는 각자의 볼레로를 추고 있는 걸까.

이후 세기의 발레리나 실비 기옘 버전으로도 올려졌는데 조르주 돈 특유의 연기력과 실비 기옘의 독보적이고 우월한 테크닉을 비교하면서 볼 수 있기에 베자르의 안무와 연출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학생인 내게 너무도 각별한 순간을 선물해 준 예술가이기도 하다. 무용 연습을 마치고 파리 생 미셸 거리를 걷던 나는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베자르와 마주쳤다. 당황한 나머지 수표책 뒷장을 찢어서 사인을 부탁하자 카리스마 넘치는 눈매를 가졌지만, 옆집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로 응해주던 모습을 기억한다. 35년 동안 무용을 해온 나는 ‘볼레로’가 건넨 삶의 질문들을 얼마나 풀었을까.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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