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불편한 진실] '일반고 황폐화'는 특목고 때문이 아니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입력 2021. 1.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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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특목고·자사고 때문에 일반고가 황폐해졌다는 주장은 거짓이거나, 적어도 과장이다. 중학교 졸업자는 매년 45만명 안팎이다. 외고·국제고, 자사고, 과학고·영재학교 입학 정원은 약 2만2000명이다. 중졸자의 5%, 고작 고교 학급당 1~2명 차이 때문에 일반고가 ‘황폐화’되다니? 다만 서울로 한정하면 이명박 정부 때 워낙 많은 자사고를 지정해서 학급당 5명 정도 차이났다. 자사고가 밀집된 강북 일부 지역은 충격이 더 심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일반고 황폐화는 특목고·자사고 때문이 아니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른바 ‘교실 붕괴’는 이미 1990년대에 시작되었다. 교실 붕괴의 첫 번째 원인은 ‘문화적 부조화’, 즉 체벌과 주입식 교육이 횡행하는 학교 문화와 풍요와 다양성을 맛보며 자란 신세대 사이의 미스매치다. 두 번째 원인은 ‘제도적 부조화’, 즉 인문계 비율이 급증함에 따른 적성과 교육과정 사이의 미스매치다. 여태까지 아무도 두 번째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1980년 고등학생 중 인문계 대 실업계 비율은 55 대 45였다. 당시 만 15~17세 가운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비율(취학률)이 불과 48.8%였으므로, 해당 연령집단 중에서 인문계 교육을 받는 비율은 26.8%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불과 10년 뒤인 1990년에 인문계 교육을 받는 비율이 15~17세 인구의 51.2%로 늘어나고 이후 계속 증가해서 2018년 76.1%에 달한다.

실업계란 직업적(vocational)이라는 뜻이고, 인문계란 학문적(academic)이라는 뜻이다. ‘학문적’ 교육과정이 적성에 맞는 학생이 그토록 많을 리가 없다. 특히 서울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중학교에서 거의 꼴찌를 해도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인구의 12~14%에 달하는 ‘경계선 지능’ 학생들에게까지 획일적인 인문계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 아닐까? 왜 모든 선진국이 의무교육을 고등학교가 아닌 중학교까지로 설정하는지 숙고해 봐야 한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정책의 일환으로 실업계고를 육성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숙련노동자를 공급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세대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산업정책을 개발독재와 관치의 산물로 간주하고, 학부모가 원한다는 명분으로 인문계고 비율을 계속 높였다. 한국 교육의 양대 포퓰리즘이 바로 대학을 무분별하게 늘린 것과 인문계 비율을 지나치게 높인 것이다. 진보 교육계는 전자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라고 짚고 넘어가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오히려 특목고·자사고 탓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예고한 것처럼 2025년 외고·국제고·자사고를 모두 일반고로 전환한다면 고입 경쟁·사교육이 감소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고 사정이 그리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나마 수준별 이동수업이 허용될 때에는 좀 나았는데, 많은 진보 교육감들이 이를 금지하면서 사정이 악화되었다.

대안은? 첫째, 매년 1만명 이상이 직업계고(특성화고·마이스터로)에 지원했다가 불합격되는 점을 고려해 직업계고 정원을 늘려야 한다. 아울러 노동시장 수요를 외면해온 건설·인테리어 등의 분야로 교육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지금 이런 분야는 외국인 노동자에 의해 잠식되고 있다. 둘째, 매년 1만명 이상이 참여하고 있는 직업 특화 위탁교육을 더욱 늘리고 활성화해야 한다. 이것은 교육기간이 6개월 또는 1년이어서 그 효과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대책 없이 사회로 진출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고 폴리텍이나 전문대를 통해 학업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셋째, 현재 교육부가 준비 중인 ‘인문계’ 중심의 고교학점제를 대폭 확장하여 다양한 IT·외국어·경영·예술 관련 과목들을 개설해야 한다. 이를테면 관광 가이드가 되려는 학생이 일본어와 사진을 선택하고, 택배 배달원이 되려는 학생이 운전과 기초 회계·세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원격교육을 활용하면 당장도 시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과목별 필수이수단위를 해제하여 이를테면 고1부터 수학을 이수하지 않을 선택권을 줘야 한다.

물론 교육부와 교육청은 아무것도 안 할 가능성이 높다. 뼛속까지 ‘인문계’맨이고, 이것 자체가 기득권이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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