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사느냐, 죽느냐” 연극 아닌 실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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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극장 방역 실험이 과학, 마스크 쓰면 옆에 앉아도 안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보았다. 이름이 ‘독백나무’다. 백과사전에는 없고 연극 배우들만 안다. 독백(獨白)은 홀로 중얼거린다는 뜻이다. 배우는 무대에서 상대역 없이 혼잣말을 하며 인물의 심리를 전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백은 햄릿이 말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다.
그런데 왜 독백나무일까. 연극배우들이 마로니에공원을 오가며 키 큰 나무를 향해 연습 삼아 독백을 숱하게 던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백나무는 어느 한 그루가 아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독백을 오늘은 이쪽 마로니에가, 내일은 저쪽 은행나무가 듣는다. 작년에 코로나만 없었다면 좋은희곡읽기모임이 ‘마로니에공원 독백나무’라는 거리 공연을 그곳에서 또 열었을 것이다.
독백은 ‘혼자서 하는 긴 말’이다. 뒤집으면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말’이 된다. 배우가 아니어도 우리는 가끔 혼잣말을 한다. 구태여 대학로까지 갈 필요도 없다. 더는 만날 수 없는 사진 속 누군가를 향해, 아니면 폭설로 엉망이 된 퇴근길에 운전대를 잡고, 또는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식당 주인처럼 우리는 웅얼거린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분노부터 넋두리까지 한국 사회에 독백의 총량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또 있을까.
연극 동네 사람들은 요즘 말을 잃었다. 기막힌 일을 당해서다. 할 말이 너무 많아도 입이 안 떨어진다. 지난달 초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자 공연 대부분이 중단됐다. ‘두 칸 띄어 앉기’ 지침으로 객석을 최대 30%만 판매할 수 있는데, 손익분기점(60~70%)에 크게 못 미쳐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누가 말했나. 지금 공연장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빈 좌석 두 개’가 있다. 관객 모두 마스크를 쓰고 침묵하는 공연장은 식당이나 대중교통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코로나 감염 사례가 단 한 건도 없었다. 마주 보며 식사한 뒤 지하철로 이동했는데, 왜 영화관에서는 한 칸을 띄어 앉고 공연장에선 두 칸을 띄어 앉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카페와 노래방, 학원과 헬스장 등 일부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영업 제한이 풀렸다. 하지만 공연장엔 여전히 가혹하다. 무착륙 국제선 여객기에서는 승객이 다닥다닥 붙어 앉고 기내식도 먹는데 왜 공연장은 30%로 틀어막는지 당국이 설명 좀 해보라. K방역 수칙이 과학이 아닌 정서로 움직인다는 의혹은 수두룩하다. 악다구니를 쓰고 집단행동을 하거나 자해라도 해야 듣는 시늉을 한다면 정부가 왜 존재하나.
독일 환경 당국과 방역 전문가들이 최근 도르트문트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의미 있는 실험을 했다. 감염자를 본뜬 마네킹을 객석에 앉히고 코와 입으로 에어로졸을 계속 분사했다. 마스크를 쓴 관객이 한 칸씩 띄어 앉고 20분마다 환기 시스템을 가동하면 에어로졸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연구진은 객석(1550석)을 다 채워도 공연장 내 감염률이 현저히 낮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이 과학이다. 불합리한 방역 수칙으로 경제활동 막아놓고 세금 살포해 위로하는 건 가스라이팅(gaslighting) 같은 폭력이지 책임 있는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공연계 종사자만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만의 전쟁과 고통을 겪는다. 대극장 뮤지컬 한 편당 배우·스태프는 약 200명. 공연은 관객에게 취미지만 그들에겐 생업이다. 최소 3개월을 바친 공연이 갑자기 멈추고 언제 재개될지 불투명해지자 상당수는 생계가 막막하다. ‘쿠팡맨’이 된 배우·스태프가 많다. 대학로 독백나무는 이제 햄릿보다 더 위태롭고 실존적인 독백을 듣는다. “사느냐 죽느냐”는 연극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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