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텅 빈 붉은 객석.. 그 '너머'를 보여준 음악의 힘

김진영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1. 1. 2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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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서 만난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무관중 실황 중계
객석 비었어도 가장 아름다운 연주.. 수만 청중 보이는 듯
음표 하나에 목숨 건 음악가들, 기쁨·희망·사랑의 '감염원'
봉쇄·희생 딛고 코로나 '너머'를 상상하는 인간의 힘 봤다

새해 첫 문화 행사로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 다녀왔다. 물론 빈에 갔던 것은 아니고, 서울의 영화관 실황 중계였다. 매년 1월 1일 열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음악 중심의 이 공연은 며칠 지나 TV로도 볼 수 있는데, 여태껏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적이 없다. 비슷비슷한 곡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데다, 대중화된 부르주아 연례 행사를 두세 시간씩 지켜볼 여유도 흥미도 없어서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답답하던 차에 부모님을 모시고 갔다.

이번 음악회의 주빈은 빈 의자다. 무관중 공연이었다. 1700여 붉은 의자에 대고 지휘자와 단원들이 절한다. 녹음된 가짜 박수가 터지자 멋쩍게 웃는다. 스크린에 전 세계 90여 나라 시청자-치어리더의 작은 창(아이콘)들이 띄워진다. 텅 빈 객석은 충격이다. 관례에 따라 ‘푸른 도나우 강’ 연주 전 신년 인사를 건넨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텅 빈 객석은 아름답다.

/일러스트=이철원

무티의 메시지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이토록 유서 깊고 아름다운 홀이 텅 비어 이상하지만, 우리를 연주하게 하는 건 여기 깃든 작곡가·연주가의 정신(spirit)이다. 건강, 건강, 건강만 생각하며 살아낸 한 해였다.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의 건강도 중요하다. 음악은 기쁨, 희망, 평화, 형제애, 그리고 대문자형 사랑(Love)으로 그 건강을 지켜준다. 음악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미션이다.”

‘푸른 도나우 강’ 왈츠가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들어본 가장 아름다운 연주이리라. 연주가 끝나자 기쁨으로 상기된 단원들이 전혀 멋쩍지 않게 환히 웃었다. 황금홀에 울려 퍼진 오랜 박수 소리를 진짜로 듣는 듯했다. 무티도 예의 멋진 이탈리안 제스처로 자연스레 인사했다. 수백만 청중을 진짜로 보는 듯했다.

그러나 아니다. 실은 그게 아니다. 그들의 인사는 눈에 보이는 관객이나 귀에 들리는 박수를 향해 있지 않았다. 코로나 이전에도 그랬으며, 후에도 그럴 것이다. 무릇 모든 음악, 모든 아름다운 정신의 목적지는 코앞의 것 저 ‘너머’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빈자리에는 그 ‘너머’가 앉아 있었다.

오래전 넬리 리라는 고려인 성악가가 해준 말이 있다. 진정한 음악가는 음 하나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적 의미에서라도 단 하나의 음, 단 하나의 획, 단 하나의 문장을 위해 죽을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의 창조물 앞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찬미의 경지도 있다. 아름다움이 베푸는 감동의 최면술 안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감동의 순간 인간은 용감해진다. 몸은 죽어도, 의식은 죽음을 넘어선다.

톨스토이는 이런 음악의 위력을 두려워했다. 음악을 너무 사랑했기에 두려워했다. 톨스토이에 의하면 예술의 목적은 ‘하나 됨(union)’이고, 예술은 감염 능력을 발휘해 사람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낸다. 좋은 예술일수록 감염력이 막강하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 전파력이 크고 빠른 음악은 인간을 최면에 빠뜨려 정신까지 마비시킨다. “음악의 영향 아래서 나는 나 자신이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고, 나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나 자신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된다”(‘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무섭고, 따라서 중국에서처럼 국가가 관장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음악의 최면력은 악용과 선용이 모두 허락되는 양날의 칼이다. 음악이 전체주의 지배와 선동의 도구일 때 인간은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반대로 음악이 공동의 용기와 인내와 위로의 동반자일 때 인간은 초인적일 수 있다. 무티가 말한 미션으로서의 음악은 영웅적인 후자 편이다.

인류사의 전범인 신화 속 인물 오르페우스가 생각난다. 죽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지하 세계로 내려가면서 그는 노래했다. 그 노래가 죽음의 신을 감동시켰고, 죽음의 괴물을 잠재웠다. 이후 인간은 공포감을 물리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노래를 부르게 된 것 아닐까 상상해본다. 죽음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코로나가 지구를 봉쇄한 지 1년, 세계 인구 200만명이 사라져간다. 얼마를 더 견뎌야 하는지, 얼마나 더 희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상대적으로 점점 또렷해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코로나 ‘너머’를 바라볼 줄 아는 인간만의 힘이다. 음악은 그 힘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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