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장의 사진]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상혁 기자 2021. 1. 21. 03:00
아무것도 없는 골목길은 없다. 사람이거나 세간이거나 골목길은 언제나 명백한 삶의 증거를 드러내보인다.
‘골목길 사진가’로 불리는 김기찬(1938~2005)은 1968년부터 서울 중림동 골목 풍경을 촬영했다. 손수레 하나 들어갈 좁은 골목에서 유년의 시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포착한 것은 고도성장 이면의 비참이 아니라 후미진 골목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만면의 미소였다. 주말마다 말없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떠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런 남편이 의아해 아내는 몰래 미행까지 해야 했지만.
1982년 6월 26일, 작가는 중림동 골목길에서 두 아이를 만났다. 지금은 중년이 됐을 당시의 꼬마들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으로 시작하는 동요처럼, 버려진 TV장(欌)에 작은 몸을 밀어넣고 얼굴만 비죽 내민 채 웃고 있다. 뒤편에서 궁핍을 드러내는 낮은 지붕의 주택들은 그러나 이들의 해사한 웃음으로 인해 정감(情感)의 거주지로 변모한다.
골목길 나들이는 2002년까지 계속됐다. 작가의 유족은 “서울의 소중한 기록으로 보존되길 바란다”며 사진 필름 원화 10만 여장 등 유품을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정진국 미술평론가는 “그는 카메라와 더불어 추억을 발명해낸다”고 했다. 그 골목길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사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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