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막장'에서 2020년 한국을 보다

한승혜 2021. 1. 2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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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성원 그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조지 오웰이 진보 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쓴 르포르타주이다. 오웰은 이후 두 달간 잉글랜드 북부 산업 지대의 탄광촌부터 공장 인근의 슬럼가를 누비며 산업재해, 주거, 실업과 같은 사회문제에 대해 낱낱이 조사했다. 읽다 보면 눈앞에 그려질 정도의 생생한 묘사에 감탄하게 되는 한편, 1930년대 영국의 상황과 2020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다소간 놀라게 된다. 인류는 늘 비슷한 문제를 두고 비슷한 형태로 갈등을 겪어왔던 것이다.

이 빼어난 책에서도 유난히 인상 깊은 부분은 막장에서의 체험에 대해 쓴 글이다. ‘막장’은 오늘날 현실성이 떨어지고 비상식적인 전개를 보이는 드라마나 소설의 수식어로 자주 사용되고는 하나, 본래 탄광의 갱도 끝에 있는 채굴 작업장을 의미한다. 오웰은 이러한 막장에 대해 “보통 사람이 지옥에 있으리라 상상할 만한 게 대부분 있다”라고 서술한다. 빈곤계층의 여러 실태를 직접 목격한 오웰이 책에서 이 정도로 강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막장이 유일하다.

도대체 막장에서 하는 노동은 얼마나 고되길래 지옥에 비견되는 것일까. 오웰의 취재에 따르면 막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1.5㎞에서 8㎞에 달하는 갱도를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갱도의 높이가 보통 1m 남짓이다. 자연히 허리를 굽히거나 기다시피 해야만 지나갈 수 있는데 광부들은 이 과정을 ‘여행’이라고 부른다. 오웰의 경우 1.5㎞를 ‘여행’하는 데 한 시간, 돌아올 때는 그 이상이 걸렸는데, 별도로 작업을 하지 않았음에도 다음 날 다리를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의 강력한 통증을 얻었다고 한다. 광부들은 출퇴근을 하는 데만도 이처럼 고된 과정을 견디고 있었다.

막장에 도달한 이후의 정식 근무시간 역시 결코 녹록지 않다. 휴식 시간이 전혀 없는 광부들은 문자 그대로 멈추지 않고 일곱 시간 반을 일한다. 유일하게 쉬는 시간은 가져온 도시락을 먹는 15분가량으로, 그 뒤 전신이 시커멓게 변한 채 몸에 들어온 석탄가루 때문에 가래침을 내뱉으며 갈증에 시달리다 다시 출근 때처럼 ‘여행’을 거쳐 갱도의 입구로 돌아간다고 한다. 거기서 공중전화박스를 2~3개 붙여놓은 듯한 길쭉한 승강기를 타고 도르래를 이용하여 지상으로 올라가는데, 이 승강기가 다시 관건이다.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사고의 끝은 예상 가능하다시피 죽음.

즉, 막장에서의 작업이란 지옥과도 같은 육체적 고통에 더해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오웰은 자신은 육체노동자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청소부나 정원사 혹은 농부 등의 일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쓰고 훈련을 받아도 광부만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랬다간 몇 주만에 죽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광부의 일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는 대단히 열악한 노동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열악하기 짝이 없는 광부들의 작업환경이 이전에 비해 나아졌다는 점이다. 오웰이 취재를 나갔던 당시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젊은 여성들이 허리에는 띠를, 두 다리는 사슬로 이은 채 팔다리로 기고 광차를 끌며, 심지어는 임신한 상태로도 그러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건장한 성인 남성도 몇 주 만에 죽어버릴지 모르는 노동을 임신한 여성들이 했다니. ‘지옥’이 그나마 나아진 것이라니. 아무리 인권이 열악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시대 상황에 경악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오웰은 말한다. 사실 광부들의 작업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다고. 왜냐하면 그들의 노동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 지하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밖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죽음, 그 책임

생각해보니 그러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앞에서 실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을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냉정한 이라도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나 달려오는 차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어린이를 그대로 지켜보고 있지만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상황이 눈에 보일 때뿐. 그러므로 우리는 무감할 수 있는 것이다. 고장난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다 달려오는 열차에 몸이 산산이 분해되는 청년에 대해,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그대로 숨이 멎는 사람에 대해, 공장의 오염물질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에 대해. 비록 사고는 안타깝지만 당장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니까.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안전을 강화해야 한다고 외친들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노동을 하며 겪는 고통이나 위험이 바깥까지 전달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에게도 전달되기 어려운 상황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기업에 제대로 보일 리 없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산재를 줄여야 한다고, 안전을 강화해야 한다고, 노동자를 살려야 한다고 거듭해서 외치는데도 수많은 기업들이 지금의 위험한 작업환경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죽게끔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상반기에만도 1101명이 일하다 죽었다. 전년도 대비 줄어들기는커녕 대폭 늘어난 숫자다.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의 의지나 마음은 한계가 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무감하기 마련이며, 설사 머리로는 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더 편하고 쉬운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고는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명시적인 법률로만 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을 희미하게나마 눈에 띄게 하려면, 이 이상 그들의 죽음을 막으려면,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기업에 더 강한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지금 당장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해야 하는 이유다.

 

한승혜 (작가·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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