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외교관이었던 그는 왜 소련의 간첩이 됐을까

김형민 2021. 1. 2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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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영국인 간첩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전쟁 때 소련 포로가 되었다가 스파이로 전향했다. 영국에서 42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감옥에서 탈주해 소련으로 넘어가 생을 마감했다.
ⓒAFP PHOTO조지 블레이크가 2001년 6월28일 러시아에서 열린 출판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전쟁포로들은 적절한 대우를 받고 포로로서의 권리를 존중받게 돼 있지. 하지만 이 제네바 협약에서도 ‘간첩(間諜)’은 제외다. “간첩 행위에 종사하면서 적대국의 영역에 들어간 충돌 당사국 군대의 구성원은 전쟁포로로서의 지위를 가질 권리가 없으며 간첩으로 취급될 수 있다.” 새삼스러운 규정도 아니다.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 육전법규 조약에 따르면 피아 식별 의무를 어기고 적군의 복장을 하고 있다가 체포될 경우 (스파이 혐의로) ‘무조건 총살형’에 처해지도록 돼 있으니까. 비단 전쟁터에서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심장부에 잠입해 비밀을 캐내고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간첩은 어느 나라든 무겁게 처벌하는 범죄야.

며칠 전인 2020년 12월27일, 한 전설적인 영국인 간첩이 세상을 떠났다. 그 이름은 조지 블레이크(1922~2020). 아흔여덟 살이니 거의 한 세기를 채운 삶이었지. 블레이크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각별하다. 그가 간첩이 된 계기가 바로 한국전쟁이었으니까.

이집트 출신의 유대계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블레이크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영국으로 망명한다. 영국군 첩보부대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다 영국 정보기관의 러브콜을 받고 스파이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되었어. 1948년 블레이크는 그때껏 거의 듣지 못했을 나라인 한국에 영국 대사관 부영사(를 빙자한 정보원)로 부임한다.

냉전 구도 속에 남북으로 나뉜 신생국가 한국은 치열한 첩보전의 무대였고 각국이 심은 스파이들은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어. 블레이크도 그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의 징후를 가장 먼저 보고한 정보원이 그였다는 설도 있지.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단 사흘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블레이크는 북한 인민군의 포로로 전락하고 말았어.

총영사 홀트와 부영사 블레이크를 포함한 영국 대사관 직원들은 압록강까지 끌려가 고초를 치른다. 포로 생활 초반, 블레이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강력하게 저항했다고 해. “북괴에 같이 억류되었던 〈옵서버〉지(紙) 특파원 필립 딘 기자가 끝까지 블레이크를 옹호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 블레이크가 억류 초기에는 매우 반발적으로 행동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중앙일보〉 1966년 10월25일).”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곧 인생 항로를 180도 바꾼다. 포로 생활 중 영국 정보원에서 소련의 스파이로 전향한 것이지. 그리고 이를 숨긴 채 ‘역경을 딛고 귀환한’ 영웅으로 귀국해 영국의 해외 정보부서인 MI6에서 중책을 맡게 돼.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철의 장막’ 저편에 있는 소련 정보기관 KGB와 소리 없는, 그러나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의 MI6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동구권 통신 집결지를 발견한 뒤 땅굴을 파서 이를 도청하는 데 성공하자 미국 CIA는 MI6의 도움을 받아 독일 베를린에서 땅굴을 파기로 한다.  

“1953년 10월22일 런던에서 미·영 양국 정보기관 회의가 열렸다. (···) 모두 9명이 참석, 상세한 계획이 논의됐다. 빈 터널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던 MI6 빈 지부장 피터 런도 때마침 베를린 지부장으로 옮겨 호흡이 척척 맞았다(〈월간조선〉 2014년 10월호).”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들여 땅굴 작전이 개시됐고 성과 역시 뿌듯할 정도로 대단했다. CIA는 “황금같이 값진 정보들을 얻었다”라고 자평하며 ‘골드 작전’이라고 부를 정도였지. 그러던 어느 날 베를린에 거친 폭우가 쏟아졌다. 소련은 망가진 통신망을 복구하는 작업에 나서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땅굴이 발견되고 말았지. 일명 ‘골드 작전’이 끝나는 순간이었어. 소련은 험악한 비난을 퍼부었지만 CIA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상황은 정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1961년 소련 KGB를 위해 일하던 폴란드인이 망명을 하며 황망한 사실을 폭로한다. “베를린 터널 작전은 MI6의 조지 블레이크에 의해 사전에 누설됐다.”  

위에 언급한 1953년 10월22일의 엄중한 비밀회의에서 서기를 맡은 자, 즉 기록자는 다름 아닌 조지 블레이크였어. 즉 베를린 터널 작전회의의 토씨 하나까지 몽땅 KGB에 넘어갔던 거야. KGB는 이 금쪽같은 스파이를 숨기기 위해 터널 작전까지 모르는 척한 거지. 심지어 동맹국인 동독 정부에도 알리지 않았어. 수많은 ‘값진 정보’들이 미국 쪽으로 넘어갔지만, 소련은 종종 역정보로 장난을 쳤고 서방 심장부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조지 블레이크를 숨길 수 있었지. ‘폭우로 인한 우연한 땅굴 발견’조차 소련의 연극이었으니 CIA는 자신이 무슨 역을 하는지도 모르는 어릿광대 노릇을 했던 거야.   

“앞으로 어느 스파이가 자백하겠는가”

조지 블레이크는 동구권에서 암약하던 스파이 수백 명의 명단을 소련 측에 고스란히 넘기기도 했지. 거기에는 MI6에 소속된 스파이 42명도 포함돼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목숨을 잃었고 영국 첩보망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 “그로 인해 영국의 첩보망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라고 영국의 대법관 파커가 통탄할 만큼. 블레이크는 체포된 뒤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42년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또 한 번 영화 같은 일이 벌어져. 감방에 있던 블레이크가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거야. 이번에는 소련 KGB의 공작이 아니었다. 같은 교도소에 수감된 반핵운동가들은 블레이크를 ‘냉전의 희생자’로 여겼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그를 탈옥시킨 뒤 동독 국경까지 데려다주었지. 이후 블레이크는 유유히 소련으로 넘어가 여생을 보내다가 며칠 전 파란 많은 인생을 마감했단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체포된 뒤에도 다른 포로들이 그를 옹호할 만큼 공산주의자에 반항적이던 영국 정보원 블레이크가 소련의 스파이로 돌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국의 MI6는 ‘공산주의자들의 세뇌와 고문’ 때문이라고 보았고, 블레이크 자신은 미국 공군의 비인간적인 폭격에 분노해 “내가 잘못된 편에 섰으며 공산주의 체제가 승리해 전쟁이 끝나면 인류에 더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주장했어. 하지만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더러 배반자라고 하지만 배반을 하려면 먼저 어디에 속해야 한다. 나는 결코 어디에도 속한 적이 없다.”  

첩보원 경력을 지녔으며 스파이 소설의 대가였던 존 르 카레는 그의 저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어. “블레이크는 외국인에다 인종차별이라는 험한 벌판 속에서 성장했고, 그를 내심 경멸하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엄청 노력했다. (···) 이런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들이 결국 봉사하게 되는 사회계층으로부터 소외돼 있었던 것이다.” 즉 영국에 충성하고자 했던 블레이크는 태생적으로 그 충성의 대상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겠지. 실제로, 영국 엘리트 출신으로 든든한 배경을 두었던 ‘케임브리지 5인방’이 공산주의에 공감해 엄청난 간첩질을 한 것이 드러났을 때 감옥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련으로 무사히 도망치거나 ‘혐의를 자백’함으로써 형벌을 모면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유대인인 데다 배경도 가문도 없는 조지 블레이크는 징역 42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지. MI6조차 못마땅해했던 중형이었어. “(이렇게 무거운 형벌을 때리면) 앞으로 어느 스파이가 자백하겠는가.” 석연치 않은 판결은 함께 감옥에 갇힌 반핵운동가들의 정의감을 자극했고,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블레이크를 탈출시키게 만들었으니 영국의 패착은 자업자득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자처했으나 그 해 아래 그림자를 살피지 못했던 대가를 치른 셈이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공산주의의 몰락, 그리고 코로나19 시대까지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들을 모두 목도한, 네덜란드 출신의 이집트계 유대인, 영국의 외교관이자 소련의 간첩이었던 조지 블레이크는 마지막에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것이 궁금하구나.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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