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걷다보면 다 만나는 '역사·옛사람·풍경'

배문규 기자 2021. 1. 2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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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km 조선 왕릉 순례길 담아 '왕릉 가는 길' 펴낸 도보답사 전문가 신정일씨

[경향신문]

경기 구리 동구릉의 시작인 태조 건원릉은 조선왕조 왕릉 제도의 기준이 되었다. 능으로 오르는 향어로를 지나 정자각과 비각, 봉분으로 이어진다. 태종이 봉분에 잔디 대신 태조의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쌤앤파커스 제공

“제가 안 가본 데 없이 돌아다녔잖아요.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 올레길도 저마다 매력이 있지만, 조선 왕릉 순례길처럼 안전하고 아름다운 길은 없는 것 같아요. 왕릉에선 역사를 알 수 있고, 옛사람의 이야기가 얽혀있죠. 말 그대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조선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지만, 그 아름다움과 문화적 가치가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대부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걸어볼 수 있음에도 말이다. <왕릉 가는 길>은 도보답사 전문가 신정일씨(67·사진)가 600㎞에 이르는 조선 왕릉 순례길을 담아낸 책이다. 신씨는 지난 12일 전화 인터뷰에서 “왕릉 길을 걷는 시간만큼은 세상 욕심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어느새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될 수 있다”며 “마음이 통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을 수 있는 사람과 간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성종·정현왕후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이 있다. 순종의 유릉은 고종의 홍릉과 함께 황제릉으로 조성되었다. 세종의 영릉은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왼쪽 사진부터). 쌤앤파커스 제공
엎어지면 코 닿을 도심 속 보석
배산임수 지형에 터잡은 명당
울창하고 아름답고 안전한 숲

조선시대 왕실의 묘는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된다. 능은 왕과 왕비, 원은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세손과 세손빈, 빈의 무덤이다. 묘는 대군과 공주, 옹주와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이다. 조선에는 27명의 왕과 왕비, 추존 왕을 합쳐 42기의 능이 있고, 14기의 원과 64기의 묘가 현존하고 있다. 대부분은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데, 신의왕후의 제릉과 정종의 후릉은 북한에 있으며, 비운의 임금 단종의 장릉만 강원도 영월에 있다. “2019년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님의 전화를 받았어요. 서울 근교 조선 왕릉 답삿길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죠. 본격적인 답사를 다니며 놀랐죠. ‘나라 안에서 제일 많은 길을 걸었다고 하면서도 숨은 보석을 등한시했구나.’ 어느 왕릉을 가건 온갖 나무들이 울창한 아름다운 숲길을 거닐 수 있습니다.”

왕릉 순례길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역사 속 사람 이야기”다. “중종의 비 단경왕후(1487~1557)의 온릉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입니다. 단경왕후는 중종이 왕위에 오르고 7일 만에 폐출되는데 사연이 슬픕니다. 단경왕후는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었고, 연산군의 비 거창군부인 신씨도 신수근의 여동생이었습니다. 반정을 준비하던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묻습니다. ‘대감,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하십니까?’ 신수근은 ‘임금은 비록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 뿐입니다’라며 자리를 박찼다고 해요. 결국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은 살해당합니다. 단경왕후는 20살에 쫓겨나 71세에 사저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 뒤 1739년(영조 15년) 복위되었습니다. 온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어 왕릉답지 않은 모습인데요.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 신수근의 묘와 반정의 핵심이었던 성희안의 묘도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죠.” 책에선 조선 최초 왕릉인 신덕왕후의 정릉부터 정조의 건릉까지 49곳을 담았다. 걷다보면 “왕릉에 묻힌 사람 그리고 그와 함께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왕릉은 최고의 명당이기도 했다.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에 터를 잡았다.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은 이름 그대로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땅에 피는 아름다운 꽃, 즉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고 한다. 지관들은 “이 능의 덕으로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 더 연장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인의 입장에서 명당이라는 것이, 심지어 죽은 사람의 묫자리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좋은 묫자리는 자신이나 자식의 발복을 위한 좋은 자리를 찾는 게 아니라 선친이 저승에서 편히 계시라고 찾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 좋은 자리는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눈에만 보인다고 해요. ‘선하게 살아라’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는 것이죠. 오늘날 왕릉이 좋은 자리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가보면 아늑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그러다보니 상상력이 풍부해져요. 이렇게 좋은 곳들이 서울 근교 엎드리면 코 닿을 만한 거리에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죽은 사람의 공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곳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마음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되고
어린아이가 되는 곳
‘나’를 만나는 지름길이죠

1985년부터 도보답사에 나선 신씨는 금강에서 압록강까지 한국의 10대 강 도보답사, 한국의 옛길 답사, 400여개 산 등정 등을 해왔다. 평생을 길 위에서 보낸 셈이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나 음식보다 걷는 것이 제일이라는 말이죠. 걷기는 ‘속살’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을 하다보면 느낄 게 없지만, 천천히 걷다보면 문화유산과 사람을 만나게 되잖아요. 그리고 깨달음을 얻게 되죠. 결국 내가 나를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조선 왕릉 길의 시작은 조선의 궁궐을 나오면서 시작된다. 서울 강북의 정릉과 태릉, 강남의 선릉과 정릉 등 이름부터 낯익다. 구리 동구릉이나 고양 서오릉처럼 한 번에 여러 곳을 둘러볼 수도 있다. “왕릉은 죽은 사람의 공간이 아니라 산 사람이 옛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공간입니다. 코로나19만 진정되면 훌쩍 떠나보시죠.”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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