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도 빛나고 함께라도 빛나는 그대가 나임을..

남원 | 글·사진 김종목 기자 2021. 1. 2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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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의 천년고찰' 전북 남원 실상사

[경향신문]

석장승은 실상사 일주문 역할을 하는 해탈교에서 방문객을 먼저 맞는다. 벙거지에 주먹코, 커다랗고 둥근 눈의 장승에서 사람들은 익살과 해학을 읽는다. 친환경 매장 느티나무의 ‘빵아재’ 이용준씨 반려견 하루가 장승 친구가 되어주곤 한다. 석장승은 조선 영조 때 세웠다. 천년고찰 실상사엔 신라와 고려, 조선의 시간이 중첩돼 흐른다.

흔하디흔한 ‘사랑해’라는 말도…

실상사 목탑지 가운데 노란 리본을 본뜬 1m 높이 안팎의 조형물이 들어섰다. 실상사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이곳에 천일기도단을 만들었다. 그해 8월30일 천일기도에 들어가 2018년 5월10일 마쳤다. 지난 12일 전북 남원시 신내면 입석리에 있는 절에서 목탑지부터 들렀다. 리본 조형물 아래 놓인 검정 기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민아 사랑해 할머니가…2020년 6월28일”. 흰색 매직으로 쓴 글 중 줄임표에 시선이 머물렀다. 만 6년이 지나고도 끝내지 못한 채 진행형인 아픔이 줄임표에 새겨진 듯했다. 그 흔하디흔한 ‘사랑해’라는 말도 무겁게 다가왔다.

목탑지엔 여러 기왓장이 놓였다. 사람들은 개인 기복과 안녕보다 이상(理想)을 기원했다. ‘평화’ ‘인류’ ‘나눔’ ‘성평등’ 같은 단어를 적었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유네스코 헌장 서문)를 새긴 기와불사도 보였다.

이 목탑지는 실상사의 융성했던 과거를 알리는 지표다. 고려 시대 73m 높이 9층 목탑을 축조했다. 1층 면적은 420.25㎡(127평). 안내판은 “황룡사 9층 목탑에 버금가는 규모”라고 적었다.

실상사 강당 선재집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구름에 싸인 봉우리가 천왕봉이다(위 사진). 신라, 고려 때 실상사에서 쓴 기와로 쌓은 탑.

실상사 창건은 통일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흥덕왕 3년(828년) 때 홍척이 세웠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최초 사찰이다. 역사학자나 승려들은 대규모 사찰로 커갔으리라고 본다. 1996~2005년 신라와 고려 당시 사찰 기와를 발굴해 탑을 세웠다.

여러 고초를 겪었다. 이름난 고찰이라 도굴의 대상이 됐다. 1989년 도둑이 실상사 백장암 석등과 부도를 헤집었다. 1967년 실상사에서 비천좌상이 새겨진 신라 대종이 발견됐는데, 서울 고철 수집상의 탐지기에 걸린 것이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실상사도 불탔다. 숙종 때 중창했는데 고종 때 다시 소실됐다. 함양과 산청 출신 유생들이 절터를 뺏으려 불 질렀다. 1884년 중건한 사찰이 지금에 이른다. 천년사찰의 흔적은 곳곳에 있다. 홍척의 공덕을 기린 증각대사탑비는 비 머리와 거북머리의 받침돌만 남았다. 1200여년간 진행된 균열이 깊고 굵게 비 머리의 한쪽을 파고들었다. 동서의 쌍둥이 삼층 석탑은 화재와 도굴을 버텼다. 당시 석탑 중 상륜부가 온전히 남은 건 실상사의 것이 유일하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천일기도가 진행된 목탑지 가운데 노란 리본 조형물 아래엔 “유민아 사랑해”라고 적은 기와 불사가 놓였다.

“우리 산하의 신음소리 들리지 않나요”

철조여래좌상은 철불이라 살아남았다. 이 철불이 놓인 약사전 앞에서 절 너머를 바라보면 지리산 산맥이 드러난다. 풍수지리 연구가 최창조는 언론 기고와 책에서 “무쇠 철불은 시선을 지리산 정상 주봉인 천왕봉으로 두고 있다. 거기서 그 시선을 직선으로 연장하면 일본인들이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받드는 후지산으로 연결된다”고 했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와 최후로 뭉친 절맥처(節脈處) 지리산의 기맥이 일본으로 뻗어가는 것을 막으려 좌대 없이 철불을 앉혔다고 본다. 철불이 쇠침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보광전 법당 동종엔 일본 열도가 새겨졌다. 타종 때 일본을 강타해 국운을 융성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이 절은 11㎞ 거리의 황산 대첩비와 연결하는 ‘호국 관광’ 코스였다.

호국의 장소가 생명평화 상징 사찰로 거듭나기 시작한 건 1990년 중반 이후다. 도법이 주지로 온 뒤다. 맹렬한 개발에 거세게 저항했다. 도법과 수경, 연관이 2000년 풀꽃상을 받았다. 댐 건설 이야기가 다시 나올 때다. 실상사 초입 전 들판 바위에 붙은 안내판엔 이런 글이 적혔다. “물봉선의 꽃말은 그래서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touch-me-not)’입니다. 물봉선의 조용하고 무섭도록 낮은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는 난개발로 능욕 당하고 있는 우리 산하의 신음을 대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 표지엔 ‘만물동근(萬物同根)’이란 말도 적혔다.

그 생명평화의 기운이 최고조에 달한 건 2000년대 후반이다. 2009년 실상사를 찾았다. 당시 실상사는 중창 불사에 관한 논의도 진행했다. 건축가 정기용(1945~2011)도 참여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마치 인간들은 다 증발해버리고 아파트 당첨을 기다리는 사람들만 사는 것 같은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전 국토에 이렇게 많이 짓고 때려 부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정기용의 말은 대종처럼 지금도 묵직하게 울린다. 정기용은 “눈에 들어오는 안성(眼城) 내의 공동체를 다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절과 마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실상사 전언’도 제안했다. 실상사 홈페이지(silsangsa.or.kr)는 당시 토론과 논의를 보존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인월~금계) 중 장항마을의 노루목 당산 소나무와 신내면 일대 전경(위 사진). 대숲 쪽 벤치에서 얼음을 매만지며 노는 아이의 모습. 실상사는 어린이에게도 열린 공간이다(가운데). 보광전 앞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과 석등. 이 자리에 서면 절이 지리산 봉우리로 둘러싸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디를 가든 내가 풍경의 중심이 되는 땅

‘인드라망’에 관한 생각도 확인한다. “한몸 한 생명으로서 나와 네가 분리될 수 없듯이 사찰과 속세가 분리되지 않는다. 불교가 세속으로 들어가 문제 해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이해경 지리산영농조합법인 대표).”

‘인드라망 생명살림의 연대’가 산동면 만행산 기슭에 버려진 절 귀정사에 만든 것이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다. 수배·투옥에 시달리던 시인 송경동이 2013년2월 귀정사에 머물렀다. 쉼터의 출발이었다. 노동자와 활동가, 농부들이 두레로 이 쉼터를 건설했다.

송경동은 청와대 앞에서 ‘김진숙 복직 촉구 무기한 단식’을 30일째(20일 기준) 진행 중이다. 단식을 끝냈을 때 몸과 마음을 추스르러 이곳을 다시 찾을 수도 있다. 쉼터가 있어 다행이 아니다. 쉼터가 계속 필요한 사회가 문제다.

실상사가 2009년 낸 ‘생명평화 백대서원문’ 6항은 “국가, 민족, 종교, 이념 등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가치가 생명평화임을 확신합니다”이다. 자본과 개발 문제를 두고 세상은 변화한 게 없는데, 바뀐 정치권력 앞에서 그 서원의 각오가 무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사는 한때 “인드라망 이념의 근본도량”으로서 “세상의 문제 해결에 대한 많은 대안을 제시하는 사찰과 불교의 새로운 전형”이란 평가를 받았다.

10여년 만에 다시 찾은 절간의 평온한 풍경은 복잡한 상념을 날렸다. 해탈교 초입 익살스러운 표정의 석장승이 방문객을 맞는다. 반려견 ‘하루’가 울타리에 발을 얹고 놀았다. 경내에선 고목에 매단 그네를 타는 아이, 대숲 앞 벤치에서 잔설과 얼음으로 놀이를 하던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 절에선 어린이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탑비니 석등엔 아이들이 입말로 적어낸 안내판을 붙였다.

정기용은 실상사를 두고 “어디를 가든 내가 풍경의 중심이 되는 땅”이라고 했다. 천왕봉을 직시하며 자신과 풍경에 빠져들 수도 있다. 종무실 안내판에 걸린 글귀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홀로도 빛나고 함께도 빛나라”를 읽고 절을 나왔다.

남원 |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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