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소한 공정 논란 벗어나려면, 모두가 모두를 돕는 '관계적 존재론' 발전시켜야" [흑백 민주주의 ④]

백승찬·조문희 기자 2021. 1. 2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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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공정론' 연구하는 애리조나주립대 김정희원 교수

[경향신문]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가 지난 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조직공정성과 정의,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불평등 개선과 참여 확대 등을 연구해왔다. 권도현 기자

지난해 대한전공의협의회는 공공의대 설립, 의대정원 확대 등에 반대하며 정부의 의료정책 추진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까지 언급하며 “모든 청년들과 연대하려 한다”고도 했다.

정부가 당시 의사 국가고시를 거부한 의대생들을 위해 이달 중 추가 국시를 실시하겠다고 하자 반대 여론이 일었다. 보건의료노조는 성명에서 “공정과 형평이라는 원칙을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정’이라는 가치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만능열쇠처럼 사용된다. 공정이 무엇이기에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됐을까. 공정 개념을 연구해온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를 지난 6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김정희원 교수는 “공정 개념이 왜곡돼 사용되고 있지만, 단지 ‘20대의 공정성 감각을 배워야 한다’는 담론이 인기를 끌면서 거시적·구조적 분석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의협의 의사국시 논란에서
양측 모두 공정의 가치 내세웠지만
결국 정부가 순응하며 목표를 접어
조율 과정에서 ‘물밑작업’도 문제

- 의사국시 논란의 양측에서 모두 ‘공정’을 주요 가치로 내세웠다.

“갈등관리 측면에서 정부가 명백히 자충수를 뒀다. X축을 관계, Y축을 목표라고 해보자. 목표가 중요하면 싸워 이겨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상대에게 맞춰주면 된다. 의대생 추가 국시는 정부가 관계를 위해 목표를 접은 것이다. 이는 강자에게 순응(accomodation)한 결과다. 이론적으로 볼 때 정부가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고 의대생은 시험으로 자격증을 얻어야 하는 전문가 집단에 불과한데, 반대로 정부가 진 상황이다. 외교든 내치든 정부의 갈등해소 방식은 관계와 목표의 중간지대여야 한다. 어느 쪽도 원하는 걸 다 갖지는 못하면서 조금씩은 챙겨가는 것이다. 코로나19 국면이고 의료계가 피로를 호소하니, 추가 국시도 명분이 없지 않았다. 시험 보지 않은 의대생 중 비수도권 지역이나 공공병원에 지원할 사람에게 다시 국시 응시 기회를 준다거나 하는 전략적 사고를 했으면 어땠을까. 정부가 의사협회와 조율하는 과정을 ‘물밑작업’했다는 점도 문제다. 절차의 공정성 못지않게 공정한 절차를 만드는 과정을 알리는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

한국인의 자생적 이론 ‘금수저론’
불평등에 대한 탁월한 관점 보여
현대사회에 퍼져있는 ‘능력주의’
평가 방식 자체가 기울어져 무효

- 입시나 병역 비리 등에 민감한 한국인의 공정 감각이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미국에 살다보니 사회 구조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이 탁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선명한 사례는 ‘금수저론’이다. 각자 출발점이 동등하지 않고, 부와 불평등이 세습되고,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낸 자생적 이론 아닌가. 미국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깊은 신념이 있는 나라다. 학생들에게 ‘자유의지로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나’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답한다.”

- 마이클 샌델 역시 최근작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능력주의’를 비판했다. 능력주의는 불가능할뿐더러, 하층계급에게 더욱 큰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능력주의적 세계관은 워낙 보편적으로 퍼져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학자의 성취를 측정하는 방식은 순수하게 능력주의적으로 보인다. 논문 개수, 피인용 횟수, 논문이 게재된 저널의 영향력 등에 따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실제로는 능력주의가 아니다. ‘팬데믹 상황에서의 재택근무 도입과 효과적 협업 방식’ ‘팬데믹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의 회복탄력성’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고 치자. 내가 후자에 훨씬 공을 들여 좋은 논문을 썼다 하더라도, 많이 인용되고 펀딩도 받을 수 있는 논문은 전자다. 학계 이외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기울어져 있다.”

- 의사, 공기업 정규직 등이 공정성을 빌미로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을 ‘담론의 무기화’라고 비판했다. 반대로 소수자들이 담론을 무기로 삼을 가능성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소수자의 경우 ‘무기’라는 전쟁 관련 비유보다는 ‘담론의 권력화’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한다. 권력화 측면에서는 관점이론(standpoint theory)이 먼저 떠오른다. 관점이론의 핵심은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 입장만 알지만, 비주류는 주류와 비주류의 삶을 모두 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지배관념 대신 ‘파편적 관념’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비주류가 주류에게 ‘너는 주류고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만, 그건 파편적이다. 내가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전환이 주는 힘이 있다고 본다.”

- 한국 사회에서는 청년, 그리고 남성이 ‘공정’에 더욱 민감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가 있을까.

“박탈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상대적 박탈감이다. 빈자가 부자를 보고 느끼는 종류다. 또 하나는 사회학자 마이클 킴멜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남성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어그리브드 인타이틀먼트’(aggrieved entitlement·빼앗긴 자격)다. 이 감정은 빈곤층이 아니라 전통적인 기득권층에서 나타난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노력했으면 부와 명예를 누렸는데, 왜 지금은 그렇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이다. 대졸 남성이 예전처럼 쉽게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여성이나 소수자를 향해 화풀이하는 것이다.”

김정 교수는 협소한 공정 논란을 벗어나기 위해선 ‘개별주의적 존재론’을 벗어나 ‘관계적 존재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전자가 각자도생 원리에 충실해 경쟁을 촉발시킨다면, 후자는 “관계가 먼저 존재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신자유주의로 득세한 ‘개별주의’
지구적 재난 상황서 통하지 않아
상호부조 강조하는 관계적 존재론
미국선 ‘뮤추얼 에이드’로 구체화

- 관계적 존재론이 사회 속에서 실천적으로 활용될 수 있나.

“개별주의적 존재론이 득세한 것은 신자유주의 이후다. 전 지구적 재난 상황에서 각자도생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관계적 존재론의 핵심은 단순히 ‘우리가 연결돼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나는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 있다’ ‘모두가 모두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미국에선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이 ‘뮤추얼 에이드’ 조직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해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다. 일종의 상호부조 네트워크다. 각자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가족이나 친구, 사회복지사 등을 떠올려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걸 공통의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확대하는 것이다. 간단하게는 ‘내가 오늘 빙판길에 넘어져서 나갈 수가 없는데, 누가 감기약 사다줄 수 있어?’ 하면, 네트워크 안의 한 사람이 ‘퇴근길에 들러 사줄게’ 하고 답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계속하다보면 도움, 참여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는 것이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주장이다. 한국에서는 ‘오늘 LG트윈타워 로비에서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에게 음식 가져갈 사람’을 모으는 식이다. 존재론적 위계를 상정하는 ‘자선’보다는 ‘연대’가 필요하다.”

백승찬·조문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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