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큰 어른, 선비적 경영자 南皐 떠나다

이윤재 2021. 1. 2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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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 별세
그룹 설립자 수당 김연수의 5남
兄이어 그룹경영하다 조카에 넘겨
명문가 선비정신을 기업문화 접목
대한상의회장·부회장으로만 18년
인품·조정력 탁월한 '재계 덕장'
"사업이란 제조업을 통해 산업보국을 실현해야 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 개발과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의 영속성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국가 경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것은 아버지가 사업을 바라보는 시각이었으며 나의 신조이기도 하다."(2015년 회고록 '묵묵히 걸어온 길' 중)

72년간 산업보국을 위해 헌신한 한국 재계의 거목 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이 20일 오후 2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5세. 고인은 삼양그룹 창업주 수당 김연수 선생(1896~1979)의 7남6녀 중 5남으로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49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삼양사에 입사했다.

입사 후 형님이자 '영원한 동지'인 김상홍 명예회장(1923~2010)과 함께 부친을 모시며 정도경영과 중용을 실천해 오늘의 삼양을 만들었다. 김상홍 명예회장 타계 이후 2011년 11월 삼양홀딩스그룹 회장에 취임해 그룹을 이끌었다. 현재 삼양을 이끄는 조카 김윤 회장도 같은 시기에 회장으로 취임했다.

김상하 명예회장은 명문가 선비정신을 기업 문화에 접목해 국가·사회 발전 선봉에 섰다. 재계에서는 인품·화합·조정력이 탁월한 '재계 덕장'으로 그를 추모했다.

고인은 1950~1960년대 한국의 제당·화섬 사업의 토대를 구축해 국가 경제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기술 도입과 공장 건설을 도맡았던 고인은 1952년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제당 사업의 필요한 기술과 인력 확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68년 폴리에스테르 사업 진출 시에도 그의 손길이 곳곳에 닿았다. 김 명예회장은 연수생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기술 교육을 함께 받았다. 김 명예회장은 1975년 삼양사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후에도 공장 증설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해 기술 개발과 설비 개선을 강조했다. 치밀한 경영관리는 삼양사가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업체로 도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80~1990년대에는 첨단 소재로 각광받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사업과 TPA 사업에 진출해 섬유를 넘어 화학소재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현재 화학소재 사업은 삼양그룹을 대표하는 주력 사업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1996년에는 패키징, 의약바이오 사업에 진출해 삼양의 미래 성장동력을 더했다.

김 명예회장은 평생 '분수를 지켜 복을 기르고(養福), 마음을 너그럽게 하며 욕망을 절제하여 기를 기르고(養氣), 낭비를 삼가 재를 기른다(養財)'는 '삼양훈'에 따라 과욕을 경계하고 극단을 멀리했다. 김 명예회장은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구분하는 리더의 단호함도 보여줬다. 대표적 사례가 화섬사업 확대 중단이다. 1990년대 공급과잉 우려 속에서 국내 모든 업체가 경쟁적으로 신·증설을 추진하던 당시, 고인은 화섬사업 확대 중단을 선언했다. 심지어 신사업으로 추진하던 폴리에스테르필름 사업마저 철수했다. 이미 많은 투자가 진행됐지만 화섬산업의 한계를 미리 내다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곧 닥친 외환위기는 김 명예회장의 혜안을 보여줬다.

직원들에게는 따뜻한 정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매달 한 번은 공장을 순회하며 '현장의 직원들이 삼양의 삶을 책임진다'고 격려했다. 특히 경영 환경이 어려운 사업장을 우선적으로 방문했는데 주변에서는 이를 '콩나물시루를 돌보는 기질'이라 말했다. 웃자란 콩나물은 누르고, 덜 자란 콩나물에는 물 한 방울이라도 더 준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협의하는 문화는 창업주 시절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협력적인 노사관계는 지금도 삼양의 기업 문화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직원들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고인은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한 후에 음식의 맛이나 직원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직원들이 좋아하면 더없이 행복해했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검토하던 임원에겐 "기업 환경이 일시적으로 악화됐다고 직원을 함부로 내보낼 수 없다. 오늘의 모든 책임을 직원들에게만 지게 할 수 없다"며 인원 감축을 백지화했다.

김상하 명예회장은 18년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및 부회장을 맡는 등 100개가 넘는 단체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특히 1988년 취임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12년간 재임하며 최장수 회장 기록을 남겼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재임 시절 외환위기를 맞은 김 명예회장은 거의 매일 상공회의소로 출근하며 한국 경제가 흔들림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매일경제와는 '비전코리아 운동'을 추진한 각별한 인연이 있다. 고인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비전코리아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가 경제 위기 타개에 앞장서고, 국민에게는 활력을 불어넣었다. 고인은 2007년 "비전코리아 운동은 벼랑 끝에 떨어진 한국에 비전을 만들어 내고 한국을 지식 기반 사회로 탈바꿈시켜준 국민운동이었다"며 "매경 국민보고대회에서 나온 제언을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따랐다면 벌써 국민소득 3만달러 국가에 더욱 빨리 진입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유족으로는 아내 박상례 여사와 아들 김원 씨(삼양사 부회장), 김정 씨(삼양패키징 부회장) 등 2남이 있다. 삼양그룹은 고인의 유지를 따르고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조문을 비롯해 조화,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한다는 뜻을 밝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 발인은 22일 오전 8시 20분.

[이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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