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운동보다 좋다는 장수의 비결

김은형 2021. 1. 20.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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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의 스틸컷. 원제는 ‘브래드의 사회적 지위’다. 오십대로 들어서기 전, 경제적으로 성공한 대학 친구들을 만나며 주인공은 자괴감에 빠진다.

김은형 | 논설위원

새해를 맞으며 우리 나이로 오십살이 됐다. 쉰살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숫자판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듯한 오십살이 편하다. 이십대에는 서른살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삼십대에는 마흔살을 맞는 기분이 어떨까 궁금했다. 하지만 사십대 때는 오십살의 느낌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느낌 아니까. 오십대를 주제로 한 책의 에필로그는 팔십대를 향해가는 엄마가 “참 좋은 나이지”라고 하거나 구순의 옆집 할머니가 “아직 한창때구먼”이라고 찬탄하는 것으로 끝난다. 책을 덮고 나면 더 심란해질 뿐이다.

하지만 오십살의 새해가 떠오르는 게 우울하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나를 성장시킬 결심을 하고 계획을 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조금 자유로워진 것 같다. 전문성을 쌓기 위해 대학원에 간다거나, 승진을 위해 자격증을 딴다거나, 외국에 나갈 기회를 얻기 위해 외국어 점수를 올린다거나, 하다못해 교양과 인격을 쌓기 위한 고전 100권 탐독 같은 계획을 세워야 할 명분이 사라졌다. 올봄 석사과정에 들어가는 내 친구처럼 오십대라고 이런 노력이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는 옵션. 노안 때문에 글자도 잘 안 보이는데 웬 고전 100권? 물론 오십대에도 아침드라마처럼 경쟁 상대의 약점을 잡아 최고위 임원을 꿈꿀 수 있고 국회에서는 여전히 300개의 대권 시나리오가 움직이겠지만 야심을 불태울 인적 물적 자원도 없으니 삼사십대의 불안과 강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듯하다.

그래도 계획이 전무하면 허전하니까 올해에는 장수의 척도라는 허벅지 근육을 키워보는 데 주력하고자 했다. 달리기를 시작할까, 몇몇 친구가 만성 요통이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했다는 필라테스를 해볼까 고민하는 중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달리기보다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게 건강한 노후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다.

최근 출간된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을 보면 운동은 사망 위험도를 23~33% 낮추지만 가족 및 친구와의 든든한 지원망이 형성되면 위험도가 45%까지 낮아진다. 특히 감정을 나누는 걸 중요시하는 여성의 경우 친구를 만나지 않으면 조기 사망도가 2.5배나 높아진다고 한다. 친구들과의 흥청망청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는 누구보다 충실하게 건강한 노후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뿌듯함이 느껴질 지경이다.

그런데 책은 이렇게 이어진다.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누가 우리의 배우자 또는 가족인지 알기는 쉽지만, 누가 친구인지는 어떻게 알까?”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일주일에 5일을 함께 마시던 친구와는 연락이 끊긴 지 몇년 됐다. ‘베프’라고 생각하던 한 친구가 최근 직장 그만둔 걸 페이스북을 통해서 알게 됐다. 이십대였다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따졌겠지만 이제는 묻지 않는다. 이유가 있겠지. 나 역시 스트레스와 고민을 허물없이 털어놓는 친구에게도 못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젊은 시절처럼 친구와 모든 걸 공유하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아졌다. 돈이든, 짐이든, 수치스러움이든.

중년의 우정이란 무엇일까.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2017)의 원제는 ‘브래드의 사회적 지위’(Brad’s status)다. 오십을 바라보는 브래드는 사회정의를 꿈꾸며 비영리단체를 이끌고 있다. 소신 있게 살아왔지만 최근 들어 금융계 큰손으로, 유명 정치인으로, 대박 난 스타트업을 팔고 하와이에서 여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대학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실패한 인생이라는 자괴감에 빠진다.

이십대 때만 해도 같은 출발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의 처지는 꽤나 극적으로 달라졌다. 수백억의 자본금을 굴리는 기업가가 있는가 하면 택배노동을 하는 친구도 있다. 사회적 지위나 부의 격차가 아니라도 미묘한 갈림길들이 많아졌다. ‘영끌’해서 집을 산 친구에게 집값 폭락에 대한 바람을, 회사에서 잘릴 위기에 있는 친구에게 직장생활의 권태로움을, 자식 입시에 성공한 친구에게 내 자식의 게임중독 걱정을 꺼내기는 어렵다. 하다못해 최근에는 죽을 때까지 정치적 성향이 같을 줄 알았던 친구들과 갈라서는 우정도 허다하지 않은가.

십대처럼 모든 걸 공유하거나, 친구의 배우자 선택까지 관여하는 이삼십대의 밀착감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중년 이후의 우정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것도 같다. 공지영 작가는 에세이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친구를 등산길의 동료에 비유하며 이렇게 썼다. “누군가를 만나 함께 걸을 수는 있지만 때로는 운이 좋아 정상까지 함께 갈 수도 있지만 대개는 갈림길에서 헤어지거나, 각자가 걷는 속도에 따라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한다….” 중년이 되면 사랑뿐 아니라 영원할 것 같던 우정도 퇴색되는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도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삶이라는 등산에서 가까운 친구라도 정상까지 같이 가기는 쉽지 않다.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그때 왜 다른 길로 갔나, 묻지 않아도 만남의 기쁨에 충실할 수 있는 게 ‘나이 든 우정’의 보람 아닐까? 직장을 그만둔 친구랑 밥 약속이나 얼른 잡아야겠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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