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세상일지라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MD영화리뷰]

2021. 1. 2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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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양유진 기자] 영화 '복수의 길'(2005), '소년 감독'(2007) 등에서 이주노동자 삶을 다룬 이태겸 감독이 하청 노동자의 고용불안과 노노갈등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 스크린으로 옮겼다. 한국 극영화 최초로 송전탑을 주제 삼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야기다. '사무직 여성 종사자가 지방 현장직으로 파견 발령을 받고 굉장한 치욕을 겪었지만 버텨냈다'는 기사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이태겸 감독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관통한다.

원청에서 인정받던 우수사원 정은(유다인)은 하청으로 1년간 파견을 가면 원청으로 복귀시켜주겠다는 명령을 얼떨결에 수락한다. 해안가의 송전탑 수리 하청 업체에서 맡은 임무는 수리 보수. 몸에 맞는 작업복조차 없는 곳에서 정은은 갖은 역경에 직면한다. 하지만 소장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인 데다 주어진 일은 먹다 남은 음식을 치우는 것일 뿐이라도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1부터 365까지 써놓은 숫자를 하나씩 지워가며 팩소주로 하루를 버티는 정은에게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막내 충식(오정세)이다. 송전탑 수리공, 편의점 아르바이트, 대리기사까지 직업만 세 개인 막내는 모두가 불편해하는 정은을 안쓰럽게 여기고 따스한 조언을 건넨다.

처음으로 현장에 투입된 날, 정은은 자신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송전탑은 공포와 경계의 대상 그 자체다. 막내는 한 걸음 떼기도 어려운 정은에게 "밑에 보지 마시고 그냥 위에만 보고 올라가세요. 계단 올라가듯이 그냥 한 발짝씩"이라며 용기를 불어넣고, 정은은 곧 공포를 극복하고 송전탑을 오른다.

이후 정은은 끔찍한 사건을 겪으며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와 직장으로부터 해고당했을지라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현실에 맞선다.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해고는 곧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지지만, 이태겸 감독은 이 세상의 모든 정인에게 '포기하지 말고 내일을 그리라'는 희망과 위로를 선사한다.

송전탑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인 만큼 딱딱하고 칙칙한 이미지를 예상했지만 세심한 미장센과 카메라 워킹은 보는 재미를 더한다. 특히 정은이 로프 몇 개에 의지해 안개 속을 헤쳐나가가거나, 붉게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막내의 실루엣을 포착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물론 두 배우의 호연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물은 없었을 것이다. 특유의 말간 얼굴을 완벽하게 지운 유다인은 여러 차별에 맞서는 정은으로 완벽하게 거듭났고, 오정세 역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20여 년의 필모그래피를 입증했다.

다만 영화 전반에 깔리는 일렉트로니컬 음악은 몰입도를 깨는 아쉬운 대목이다. 송전탑에 흐르는 전류와 노동자가 겪는 이명을 은유, 실제 소음을 활용했다고 하지만 의미가 무색하게 어색함이 감돌 뿐이다.

이태겸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오는 28일 개봉한다. 러닝타임 111분.

[사진 = 영화사 진진]-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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