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칸 술냄새가 그리워 [꼬다리]

입력 2021. 1. 2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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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앞사람이 비틀거린다. 한둘이 아니다. 술을 얼마나 먹었길래. 해가 저문 지 한참 지났지만 상기된 얼굴들은 눈에 잘 띈다. 삼삼오오 2차 장소를 고민하거나 손을 흔들고 허리를 숙이며 다음을 기약한다. 몇몇은 택시 잡느라 바쁘다. 야근을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400m 남짓한 거리에서 매번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만났다.

사진/권도현 기자


열차 문이 열린다. 쿰쿰한 술냄새가 코에 확 닿는다. 술을 한잔도 하지 않은 사람에겐 분명 기분 나쁜 냄새다. 형광등 불빛에 사람들의 발그레한 볼이 선명해진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그리 많은지 열차 안이 복작복작하다.

나는 일하다 이제 들어가는데, 저 사람들 술자리는 재미있었을까, 내일 출근하기 힘들겠다, 좀 이따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갈까, 따위의 생각을 한다. 방금 야근을 마친 내게는 날 수 없는 그 냄새가 야속하다. 나도 어느 날엔가 비슷한 냄새를 풍겼을 텐데 말이다.

입사 후 수년간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은 똑같았다. 2019년까진 그랬다. 지난해부턴 비틀대는 사람은커녕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열차 안 냄새도 사라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고 술자리가 줄어서다. 선천적 집순이인 나도 몸이 근질근질해질 만큼 외출을 삼갔다.

한동안 맡지 못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 건 여름이 올 즈음이었다. 옷이 얇아진 것처럼 얇은 마스크를 썼기 때문일까. 다시 밖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난 건가. 코로나19에도 이렇게들 술을 먹는구나 싶다가도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요즘 회사에서 젊은 사람, 늙은 사람 가릴 것 없이 틈만 나면 주식화면밖에 안 봐.” 같은 방향 열차를 기다리던 중년의 회사원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열차 안의 사람들은 “집값이 너무 많이 올라 큰일이네”, “청약 점수가 한참 모자라네”라며 부동산 얘기만 했다. 먹고살기 얼마나 팍팍한지 서로 겨루는 듯했다. 나도 한마디 보태고 싶었다. 누가 집값 좀 잡아달라고.

야근하는 날이면 나를 괴롭힌 술냄새를 마냥 싫어할 수는 없게 됐다. 술 마신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곧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냄새는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내 냄새였다.

요 몇달은 냄새를 맡지 못했다. 코로나19 3차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식당·주점이 9시면 영업을 마치고 5인 이상 사적 모임이 금지된 탓일 테다. 열차 안 한풀이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대신 고단한 사람들이 회포를 풀던 카페와 주점, 땀을 빼던 헬스장같이 영업이 제한된 자영업자들의 호소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인력난에 지칠 대로 지친 의료진들은 “이대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열차칸 술냄새를 맡고 싶다. 퇴근길 풍경을 되찾는 길은 지긋지긋한 바이러스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마스크를 쓰고 세상과 거리를 둔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에만 기대지 않는 방역을 바라며. 냄새가 사라진 이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꼬다리’는 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실마리를 뜻하는 꼬투리의 방언이다. 10년 차 이하 경향신문 기자들이 겪은 일상의 단상을 소개한다. ‘꼬’인 내 마음 ‘다’ 내보이‘리’라는 의미도 담았다.

노도현 정책사회부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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