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이들의 동반자' 룰랭의 후예들 [우정이야기]

2021. 1. 2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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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우체부 조셉 룰랭은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의 우체국에서 일했다. 파리에서 아를로 이주한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부치러 룰랭의 우체국을 자주 찾았다. 둘은 친해졌고 서로의 집에 초대했다. 모델 쓸 돈조차 없던 고흐에게 룰랭의 가족은 기꺼이 모델이 돼 주었다. 고흐가 남긴 룰랭 가족의 초상화는 20여점에 이른다. 고흐는 이들 가족을 사랑했다. 이들을 그릴 때는 자신의 자화상과는 달리, 항상 온화하고 따뜻한 색채를 썼다.

고호가 그린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


아를에서의 행복은 계속되진 않았다. 화가 고갱과 다투고 나서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룰랭은 한동안 그의 곁을 지켰지만 결국 마르세유로 전근을 가게 됐다. 고흐는 1889년 1월 고갱에게 쓴 편지에서 “룰랭이 마르세유로 전근돼 방금 여기를 떠났네. 그가 며칠 전에 아기 마르셀을 웃기고, 자기 무릎 위에서 놀게 한 광경은 감동적이었어”라며 그를 그리워했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룰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마치 노병이 젊은 병사에게 그러하듯 진중한 마음과 다정함으로 나를 대해준단다.” 그림, 영화, 소설 등 많은 예술 작품에서 우체부들은 그렇게 묘사된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우편박물관(옛 워싱턴우체국) 서쪽 벽에는 ‘우체부란 누구인가’ 알려주는 문구가 있다. 하버드대학 총장을 지낸 찰스 엘리엇의 글이다. ‘공감과 사랑의 전달자’, ‘외로운 이들의 동반자’, ‘흩어진 가족을 이어주는 끈’, ‘일상생활의 확대자(Enlarger)’…. 고흐와 엘리엇의 시대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시대에 더 와닿는 문구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편지와 소포를 전달하는 집배노동자, 택배노동자의 역할은 더 커졌다. 만국우편연합(UPU)도 “우편 네트워크는 시민과 기업들을 그들이 필요한 서비스에 연결해주는 매우 중요한 기반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은 그 어느 때보다 주요 기반으로서의 우편의 역할을 명확하게 했다”고 말했다.

마을에 다니며 편지를 전하고 어르신들의 안부를 살피고, 심부름까지 하는 건 많은 시골 집배원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홀로 있는 노인의 보호자를 자처하기도 한다. 집배원들이 봉사단을 조직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가 하면, 남몰래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을 수년간 돕는 집배원도 있다. 엘리엇이 옛 우체국 건물에 남긴 글귀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기꺼이 해낸다.

한파가 시작된 지난 8일에도 그랬다. 경북 성주 용암면 문명리 지역을 배달하던 강기훈 집배원은 허모 할머니 집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전날 밤 한파에 언 보일러를 녹이기 위해 할머니가 불을 피운 것이 화근이 됐다. 강 집배원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불이 인근 야산으로 번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할머니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119에 신고했다. 소방차가 도착할 때까지 직접 물을 뿌려 불이 크게 번지는 것을 막았다. 그는 “무엇보다 할머니가 무사하고 큰불로 번지지 않아 다행”이라며 “누구라도 같은 상황이면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시절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게 하는 건 이런 룰랭의 후예들이 우리 이웃이기 때문 아닐까.

이재덕 뉴콘텐츠팀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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