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5위 롯데는 왜 외면받나
[편집자주] 재계서열 5위 롯데그룹이 사상 최대의 위기에 빠졌다. 유통시장에 이제 ‘강자 롯데’는 없다. 쿠팡과 네이버가 온라인 중심의 시장 헤게모니를 장악한 가운데 롯데는 조연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버팀목 역할을 하던 화학마저 업황부진으로 허덕인다. 신동빈 회장이 ‘위기극복’과 ‘변화’를 외치지만,돌파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롯데 위기의 원인을 짚어보고 뉴롯데의 길을 모색해본다.
경영권 분쟁과 국정농단 재판·구속 등으로 인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리더십 공백,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와 일본불매운동, 코로나19까지 연이은 외부악재들이 롯데의 위기를 부른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기업문화에 따른 혁신의 부재에 있다는 안팎의 지적이 나온다.
1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15일 종가 기준 롯데그룹 시가총액은 2019년 말에 비해 8% 증가했다. 4대 그룹의 시가총액이 같은기간 35~85% 가량, 코스피지수도 40% 상승한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초라한 수준이다. 그나마 업황 회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반등한 롯데케미칼, 롯데정밀화학 등 화학 계열사를 제외하면 7.8% 하락했다. 그룹 핵심 사업부문인 유통부문은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 당한 셈이다.
롯데그룹 상장계열사의 지난해 매출(4분기 매출은 컨센서스)은 전년 대비 8.1% 감소했다. 삼성그룹, LG그룹이 각각 1%, 3% 증가했고 현대차, SK그룹이 각각 2.3%, 12.2% 줄었다. 비슷비슷한 실적에도 주식시장에서 롯데와 다른 그룹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린 것은 그만큼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감 차이 때문이다.
4대 그룹은 탄소중립 경제를 중심으로 한 신성장 사업부문에 적극적인 투자로 성과를 내고 있다. 반도체, 전기차, 로봇, AI(인공지능) 바이오 등이다. 특히 공격적인 M&A(인수합병)과 글로벌기업들과의 적극적인 제휴로 체질 변화에 성공하고 있다.
반면 롯데그룹은 2015년 경영권 분쟁 이후 리더십 공백과 외부 악재, 폐쇄적인 조직 문화 등이 겹치며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실제 롯데그룹의 총 매출은 매년 하락 추세다. 2018년 84조원이었던 그룹 총매출은 2019년 74조5000억원을 기록했고 지난해 매출도 감소세를 이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룹의 근간인 유통, 식품 부문은 이전처럼 독보적인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온라인 시장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는 유통 패러다임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고전하고 있다. 지난해 향후 5년간 200여개 점포를 정리하는 등의 대대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통합 온라인몰인 롯데온을 출범하는 등 본격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지만 아직은 이렇다할 성과가 없다.
신성장동력으로 투자를 집중하고 있는 화학 부문도 기대에 못 미치는 지지부진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16년 삼성 화학 계열사를 3조원에 인수하며 글로벌 화학기업으로의 도약을 꿈꿨지만 지난해 추진했던 7조원 규모의 히타지케미칼 인수를 실패하는 등 투자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다.
롯데는 유통업계 최강자였지만, 그동안 시장을 이끌어 가는 변화의 선두에 서기보다 신규 사업에 후발주자로 들어가 막강한 유통망과 물량공세로 시장을 장악하는 보수적인 경영전략을 써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문화와 경영전략은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 대응에는 뒤쳐질 수 밖에 없고 점차 경쟁력을 잃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신동빈 회장은 최근 2년간 체질개선을 위한 조직 쇄신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VCM(Value Creation Meeting 옛 사장단회의)에서 "과거 성공 체험, 성공 경험에 집착하지 말고 1위가 되기 위한 투자를 과감히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도 권위적인 문화가 일부 존재한다"며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롯데그룹은 사드, 일본 불매, 코로나19 등 연이은 외부 요인으로 주력사들을 둘러 싸고 있는 사업 환경이 우호적이지 않다"며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일본식 경영 스타일이 이어지는 외부 위기와 급격한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업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음에도 부진한 사업군이 있는 이유는, 전략이 아닌 실행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최근 계열사 대표 등 130여명이 함께한 올해 첫 VCM(옛 사장단 회의)에서 이 같이 말했다. 이 발언은 롯데의 유통업, 특히 롯데온의 부진을 염두에 둔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쿠팡이 빠른 배송, 혁신을 외칠 때 롯데라고 가만히 있었겠느냐"면서 "이미 2014년부터 신동빈 회장이 옴니채널(omni channel)을 강조하며 온라인쇼핑의 중요성을 얘기했지만 진척이 안됐다"고 말했다.
이후 롯데 통합온라인몰 롯데온은 지난해 4월에야 출범했다. 2년간 총 3조원을 투자해 만든 온라인몰 성적은 처참하다. 모바일 빅데이터 플랫폼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롯데온 애플리케이션 월 사용자수는 112만명으로 1위 쿠팡(2141만명)의 5.2% 수준에 불과하다. 지난해 3분기까지 롯데온이 포함된 롯데쇼핑 기타 사업부문 매출액은 전년동기대비 55.6% 감소한 4280억원, 영업적자는 2180억원으로 불었다.
국내 유통 양대산맥인 신세계그룹과도 비교되는 지점이다. 신세계그룹의 온라인몰 SSG닷컴은 지난해 9월까지 총 거래액 2조 8290억원으로 지속해서 성장 중이다. SSG닷컴은 올해 목표였던 거래액 3조6000억원을 넘어 거래액 4조원에 육박했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SSG닷컴은 처음부터 신선식품을 주무기로 소비자를 공략하고, 당일·새벽배송 인프라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면서 e커머스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반면 롯데는 차별화와 전략이 없었다. 롯데가 만들었다고 보기엔 허술했다는 평가가 많다. 트래픽 과부하, 반복적인 전산 오류, 낮은 가격 경쟁력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계열사를 통합해 만든 온라인몰이라곤 했지만 나열하는데 그쳤다는 평가다. 계열사간 조율이 원만히 이뤄지지 않아, 대대적인 물량 공세도 뒤늦게 이뤄졌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오픈 5개월 뒤인 지난해 9월에 들어서야 대규모 할인 행사를 진행하면서 성장세를 이어가는 정도다.
롯데그룹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본 사람들은 롯데 특유의 관료주의 문화가 변화에 뒤처지게 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정통 롯데맨들이 많다보니 윗선에 직언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꺼내는 사람이 잘 없었다"며 "각자가 자기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룹 미래를 위한 과감한 결정도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끊임없이 '혁신'을 외쳤지만 실상 그 전략을 총대를 메고 제대로 실행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또 7개 유통 계열사를 합치는 과정에서 내홍도 끊이지 않았다. 박희진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너무 많은 계열사가 있다는 게 오히려 역량을 한 군데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라며 "상장사간 의사 결정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앞으로 롯데가 가진 핵심 경쟁력이 뭔지 찾고 그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며 "안 되는 것들은 더 과감하게 쳐내고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과거 부동산을 통한 출점 전략이 중요했지만 이제 라스트마일 서비스를 누가 잘하느냐가 경쟁력"이라며 "롯데가 오프라인 구조조정과 동시에 새로운 시도와 확장을 위해 현재 매물로 나와있는 e커머스 업체나 배달업체와의 M&A(인수합병)도 적극적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롯데케미칼은 한 해 약 15조원대(2019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며 롯데쇼핑(약 18조원)과 함께 그룹의 실적 두 축을 담당하는 주요 계열사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1조1000억원대로 롯데쇼핑(4300억원)의 두 배 이상으로 그룹 내 사실상 '캐시카우' 역할을 했다.
롯데가 글로벌 진출이나 제조업 기반의 안정적 성장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도 그룹 내 롯데케미칼의 중요성은 크다는 판단이다. 특히 롯데케미칼은 '화학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에틸렌 국내·외 생산기준(연 450만톤) 국내 최대 화학기업이다. 신동빈 회장이 1990년 경영수업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화학산업이 대규모 장치산업으로 진입장벽이 높지만 경기에 따라 실적이 순환적(Cycle) 흐름을 보인다는 점은 이 산업의 숙제다. 롯데케미칼은 또 주로 PE(폴리에틸렌)와 같은 범용 수지를 생산하는 '전통 화학기업'이란 점에서 제품 편중성 문제도 있었다.
롯데케미칼은 2011년 이후 약 10년간 연간 매출액이 15조원 안팎에서 정체된 움직임을 보여왔다. 경기 흐름 영향을 덜 받으면서 꾸준히 성장해 나가려면 범용에 대비되는 고수익 스페셜티(첨단소재) 제품군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이에 대한 롯데케미칼의 대응으로는 2015년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삼성SDI 케미칼 등을 약 3조원에 사들이기로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원료사업에 강점을 지녔던 롯데케미칼이 수직계열화를 통한 고부가가치 제품 라인업 확대로 시장 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게 됐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삼성과 빅딜 이후 롯데케미칼의 첨단소재 제품군 강화 움직임은 더 과감해졌다. 2019년 글로벌 1위 인조대리석 업체 벨렌코 지분을 인수했고 2020년에는 일본의 전자소재 업체 쇼와덴코 지분 4.69%를 사들였다. 같은 해 베트남 첨단소재 기업 '비나 폴리텍'을 인수해 동남아 시장 공략에 나섰다.
계열사인 롯데정밀화학은 동박업체 두산솔루스 인수를 위한 펀드에 출자해 배터리 관련 사업확장을 예고했다. 롯데케미칼은 기초소재를 활용해 배터리 분리막 원료를 생산중이다.
롯데케미칼의 첨단소재에서의 실적 기여도는 전통 석유화학 제품인 올레핀과 아로마틱스에 비해 아직 낮은 편이다.
2019년 올레핀·아로마틱스 매출액은 약 9조8000억원, 영업이익은 8400억원이다. 이에 비해 첨단소재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2조9000억원, 1800억원이다.
다만 증권가에서는 첨단소재사업의 지난해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각각 3조4000억원, 2600억원대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등 앞으로 고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지난해에는 가전과 자동차 소재로 쓰이는 ABS(아크릴로니트릴) 판매 호조세를 보였다.
한편 배터리, 생명과학 등 다양한 사업모델을 안착시킨 LG화학이나 한화솔루션에 흡수돼 태양광 소재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중인 한화케미칼처럼 롯데케미칼도 스페셜티 사업 색채를 좀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업계 제언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통 화학산업 강자였던 롯데케미칼이 스페셜티 사업에는 비교적 늦게 뛰어들었다는 평도 있다"며 "'다품종 소량생산'에 특화된 스페셜티 사업을 강화하려면 연구개발 비중을 좀 더 늘릴 필요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롯데케미칼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2019년 기준 0.56%(846억원)이다. 올해 3분기 누적기준으로는 0.66%(590억원) 소폭 증가했다.
김성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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