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역사] “소용돌이처럼 산하를 들쑤셔 南道를 소탕하였다”

박종인 선임기자 2021. 1. 20. 03: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245.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과 시덥잖은 친일파 신응희
1909년 일본군에 체포된 호남 의병들(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

‘제천은 지도에서 사라졌다(Chee-chong had been wiped off the map). 한 달 전만 해도 분주하고 영화로웠을 도시에는 잿더미와 덜 꺼진 잉걸불만 보였다. 나는 잿더미를 뒤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가족들은 어디 있소?” 그들이 답했다. “(시신들은) 언덕 위에 눕혀 놓았소.”’(F. 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Fleming H. Revell Company, 1920, p195) 그랬다. 망가진 대한제국 백성에게 닥친 것은 철저한 파괴였다. 1907년 8월 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제국 한국주차군이 택한 전략은 의병 및 의병 본거지 박멸 작전이었다. 영국 기자 매켄지는 이를 ‘도시가 사라졌다’고 표현했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백성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가 절멸한 것이다.

245.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과 의병장 심남일

1909년 일본은 호남지역에 활약하는 의병 토벌을 위해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실시했다. 석 달 동안 진행된 작전 끝에 의병은 박멸됐다. 이를 기념해 만든 사진첩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는 일본군은 물론 체포된 의병들과 무기, 작전지역 사진까지 수록돼 있다. 이 사진은 1909년 겨울 광주감옥(혹은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촬영한 의병들이다. /국사편찬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의 서막

1909년은 그 박멸 작전이 극에 달했던 해였다. 일본군이 ‘폭도 토벌 작전’이라고 칭했던 의병 토벌 작전은 이해 가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전남북 의병에 집중해 이뤄졌다. 1909년 한국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 와타나베 스이사이(渡邊水哉)가 통감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호남은 ‘다른 도에 비해 적세가 창궐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 곳을 정벌하면 다른 곳으로 도망쳐 대병력으로 일거에 탕진하는 방책이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통감부문서’9, 10.남한 대토벌 실시 계획 기타 (3)남한 폭도 대토벌 실시 보고, 1909년 10월 27일)

그런데 호남 지역은 일본군에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들은 마치 임진왜란의 옛날을 몽상하여 일본인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단연 대토벌을 결행해 (일본) 황군(皇軍)의 용맹에 떨게 만들어 일본 역사상의 근본적인 명예 회복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앞 보고서) 300년 전 전쟁에서 정복하지 못한 호남 땅에 대한 명예회복을 벼른 것이다.

기념 사진첩에 보인 역사적 토벌 의도

1910년 일본 사진가 야마모토 세이요(山本誠陽)가 비매품으로 제작한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주성 관문인 완주 ‘만마관(萬馬關)’과 해남에 있는 이순신의 ‘통제사이충무공명량대첩비’ 사진이 삽입돼 있다. 만마관 사진에는 ‘임진왜란 때 고전했던 만마관’, 비석 사진에는 ‘명량해전의 이순신 송덕비’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남강변에 있는 경남 진주 촉석루 암벽 사진도 포함돼 있다. ‘一帶長江 千秋義烈(일대장강 천추의열)’ 여덟 자 암각을 촬영한 사진에는 ‘진주 촉석루 아래 암벽’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진주성은 1592년과 1593년 두 차례 한일 격전이 벌어진 현장이었다. 1차전은 김시민 목사와 관군, 진주성민이 대승을 거뒀고 2차전은 조선 민관군이 전멸했다. ‘한 줄기 큰 강이 흐르듯 의열은 영원하다’는 위 여덟 글자는 이 2차전 희생자들을 기리는 글이다.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해남 충무공 이순신 송덕비 '통제사이충무공명량대첩비'.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진주 촉석루 암벽. 임진왜란 발발 1년 뒤인 1593년 일본군이 2차진주성전투에서 조선군에 승리한 흔적이다.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완주 만마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고전한 곳이다.

자기네가 고전했던 만마관, 자기네를 궤멸했던 적장 흔적과 대승의 흔적을 기념 사진첩에 삽입한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은 일본군에는 대한제국을 완벽하게 식민화하려는 작전인 동시에 역사적인 임무였다.

소용돌이치듯, 토끼 몰듯

‘교반적(攪拌的·물을 소용돌이처럼 휘젓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토벌군을 세분해 소규모 지역을 전후좌우로 왕복 수색하고, 기병(奇兵)적 수단(비정규전 전술)을 써서 폭도로 하여금 우리 행동을 엿볼 틈을 주지 않는 동시에, 해상에서도 수뢰정, 경비선 및 소수 부대로 연안 도서 등으로 도피하는 폭도에 대비했다.’(‘독립운동사자료집’3, ‘조선주차군사령부 조선폭도토벌지’, p792)

말 그대로 토끼몰이 하듯 사방으로 의병들을 거듭 몰아서 퇴로를 완전 차단해 죽거나 자수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2개 연대 총 2260명을 투입해 의병부대를 몰아 해안가까지 이들을 쫓았다. 해안에는 수뢰함 4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의병이 산중과 마을을 오가며 불시 게릴라전을 펼치자 일본군은 ‘군화를 버리고 (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짚신과 버선을 신고서’ 맞서기도 했다.(‘통감부문서’9, 앞 보고서, 1909년 10월 27일)

전남 광양 출신 지식인 매천 황현에 따르면, 일본군은 ‘북으로는 금산, 김제, 만금, 동으로는 진주, 하동, 남으로는 목포에서부터 그물 치듯 사방을 포위했다. 순사들이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고 가택마다 조사해 조금만 의심이 나면 즉시 주민을 살해하므로 이때부터 행인 종적이 끊기고 이웃 마을까지도 왕래를 하지 않았다. 의병은 삼삼오오 사방으로 도주했으나 숨을 만한 곳이 없는 탓에 힘이 강한 사람은 싸우다 죽고 약한 사람들은 땅을 기면서 애걸하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의병들은 점차 육지가 끝나는 강진, 해남까지 쫓기게 되었다.’(황현, ‘매천야록’6, 1909년③ 16. 일병의 호남 의병 토벌)

의병 토벌 앞장선 전남관찰사 신응희

호남 의병은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와 무관했다. 대신 이들은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확고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밤낮으로 분투했지만 폭도에 동정을 보내고 정황을 숨기는 지방민으로 작전에 큰 곤란을 겪었다.’(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p148) 의병과 정체성을 공유한 이 백성들을 일본군은 ‘완민(頑民·새 통치를 따르지 않는 백성)’이라고 불렀다.(‘통감부문서’9, 앞 보고서)

그런데 위 통감부 문서에는 ‘크게 감사해 마지않는 한국 관헌’이 등장한다. 작전 당시 전남도 관찰사 신응희(申應熙)다. 신응희는 ‘폭도 절멸(絶滅)에 열중해 군 간부와 함께 적세가 가장 창궐한 지역을 순시해 관리들을 경고, 독려하고 민중을 훈유하는 등 백방으로 수단을 강구한’ 자였다. 보고서는 ‘토벌에서 얻은 공적은 한국 관헌이 참여해 힘이 컸던 사실을 특히 보고하는 바임’이라고 명기했다.

1917년 도쿄 ‘조선공론사’가 펴낸 ‘인물평론 진짜냐 가짜냐(人物評論 眞物? 贋物?)’에는 신응희에 대한 인물평이 이렇게 적혀 있다. ‘백성에게 털끝만 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함. 부하를 대하는 데 아주 엄하지만 윗사람을 맞이할 때는 아첨을 하고 허리를 굽실거리기에 정신이 없음. 항상 일본 옷을 입으며, 낯선 사람이 우연히 방문하면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임.’(번역 국사편찬위)

신응희는 갑신정변(1884)에 가담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개화파였다. 그런데 1895년 왕비 민씨 살해사건 행동대원으로 활동하고 또 망명한 뒤 귀국해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지휘하고 병합 후 전남도 관찰사가 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침반도 안테나도 고장 난 인물이었다.

토벌작전 기념사진첩에는 의병들의 무기 사진이 실려 있다. 화승총과 흙 퍼내는 가래와 밭 일구는 쇠스랑. 조악한 병기로 무장한 의병과 완민은 ‘진압에 극력 힘을 다한’ 저 시덥잖은 무도배들과 소용돌이치듯 달려드는 일본군 앞에 궤멸되고 말았다.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의병들의 무기. 화승총, 농기구 가래와 쇠스랑이 눈에 띈다.

운명을 응시하는 사내들과 폭도도로(暴徒道路)

석 달에 걸친 토벌 작전 끝에 숱한 의병들이 전사하거나 처형됐다. 1909년 11월부터 1910년 8월 사이 통감부가 만든 ‘통감부래문(統監府來文)’에는 그 기간 사형이 집행된 128인 행적이 기록돼 있다. 2017년 의병연구소장 이태룡(현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이 규장각에서 발굴해 국역한 문건(‘통감부래안·統監府來案’, 순국선열유족회, 2017)이다. 이태룡은 이 문건에 수록된 128명 가운데 108명을 의병으로 추정했다. 사법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이었지만 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임의로 사형을 집행한 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통보했다.

그 처형된 사내들이 위 사진에 모여 있다. 일본군은 ‘기념사진첩’ 앞쪽에 이 사진을 걸어놓았다. 이름을 열거해본다. 황두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계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윗줄),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1909년 어느 겨울날 광주지방재판소 혹은 광주감옥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촬영 몇 달 뒤 일부는 징역형을 받고 대부분 처형됐다.

일본군에 따르면 이 가운데 ‘폭도 거괴(巨魁) 심남일, 강무경, 안계홍, 임창모 등은 엄히 부하의 비행을 계칙하여 약탈을 금하고 오로지 일본의 대한 정책 실패를 초래해 한국 독립을 안고(安固)하려는 망상가들’이었다.(‘통감부문서’9, 앞 보고서) 적의 눈으로도 참으로 의로운 지휘관들이었다는 뜻이다. 신분과 직업은 유생(심남일)에서 주막집(양진여), 머슴(안계홍)까지 다양했다. 지방 유지인 유생 임창모는 머슴 대장 안계홍의 참모였다.(홍순권, 앞 책, p253)

유생 출신 의병장 심남일.
머슴 출신 의병장 안계홍.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의병들은 체포된 후 국도 공사에 동원됐다. 해남~강진~장흥~보성~낙안~순천~광양을 연결하는 이 도로를 사람들은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목포지편찬회, ‘목포지·木浦誌’(1914), 경인문화사, 2000, p249~250)

국가는 만신창이(滿身瘡痍), 고름과 상처투성이였다. 어떤 이는 그 고름투성이 땅에 모든 걸 내던졌다. 어떤 시덥잖은 이는 그들을 불구덩이로 몰아넣었다. 그들, 망국 직전 이 땅을 밟고 서 있던 군상(群像)의 두 극단.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