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95] 말과 생각을 포기했다면 항복한 것

김규나 소설가 2021. 1. 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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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사람들은 ‘현실 제어’라 불렀지만 신어로는 ‘이중사고’라고 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뻔한 진실을 교묘하게 꾸며 거짓말을 하는 것, 모순되는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동시에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북한이 현 정권을 향해 ‘특등 머저리’라고 비난을 퍼붓자 ‘좀 더 과감하게 대화하자’는 뜻이라고 민주당 의원이 해석을 내놓았다.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했을 때 한 방송은 ‘애정이 있다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관심 있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대화를 청하고 싶다면 “특등 머저리씨,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 일이군요”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이익 공유제, 소득 주도 성장, 포용 국가, 공유 경제처럼 한글로 표기했으나 우리말로 느껴지지 않는 용어도 난무한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신년사에서 언급한 착한 임대료 운동, 필수 노동자, 백신 자주권, 선도 국가, 가교 국가와 같은 말도 낯설기만 하다. 정부가 일찍이 내건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라는 표어도 국민이 기대했던 세상을 뜻한 건 아니었다.

1949년에 출간한 조지 오웰의 ’1984′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경고한 소설이지만 2021년 전후를 내다보고 쓴 미래 예언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새로운 단어의 목적은 사고 폭을 좁히는 데 있다. 언어가 완성될 때 혁명도 완수된다. 2050년까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이해할 사람이 남아 있을 것 같은가?’라고 묻는다.

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단어가 삭제되고 의미가 왜곡되며 특정 이념을 담은 용어가 범람하는 건 위험하다. 미사일을 쏘며 서로 죽이고 땅을 빼앗는 것만 전쟁이 아니다. 말을 포기했다면 항복한 것이고 적의 입맛에 맞게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면 정복당한 것이다. 북한을 따르며 그들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말과 생각이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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