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현재가 과거를 심판하면 미래를 잃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2021. 1.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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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 과거 파헤치느라 미래 비전 찾는 일 외면
지도자 탓만 할 게 아니다… 국민이 ‘편가르기’ 거부해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은 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이 한 말로 널리 알려졌다. 사실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처칠이 한 말은 그 반대였다. ‘현재가 과거를 심문하면 미래를 잃어버린다’고 했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영국식 적폐 청산과 관련이 있다.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에게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넘기는 대가로 유럽의 평화를 지켰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1940년 서유럽을 침공하면서 거짓말이 됐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 의회는 유화주의 노선을 걸었던 체임벌린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이어서 집권한 처칠에겐 체임벌린 내각에서 죄지은 사람들을 쫓아내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처칠의 발언은 이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YONHAP PHOTO-3848> 신년 기자회견 질문받는 문재인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2021.1.18 jjaeck9@yna.co.kr/2021-01-18 15:00:27/<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적폐를 몰아내자는 요구만 거절한 게 아니다. 처칠은 밖으로는 강경한 대독(對獨) 항전을 천명했지만 내정에선 포용 노선을 택했다. 집권 보수당뿐 아니라 야당을 모두 아우르는 연합정부를 꾸렸고, 5인으로 구성되는 전쟁내각 장관 자리엔 라이벌들을 앉혔다. 대표적 유화주의자 핼리팩스에겐 외무장관직을 줬다. 내각 핵심인 국방장관을 자신이 차지하고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 노력도 도맡았지만 국민을 향해서는 정치권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지난 4년 가까이 대한민국은 적폐 청산론에 포박된 신세였다. 과거만 파헤치느라 정작 국력을 쏟을 미래 비전을 찾는 데 소홀했다. 월요일 신년 기자회견에 나온 대통령은 지지 세력 눈치 보느라 전직 대통령들 사면 문제에 딱 부러진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로 부상한 이재명 경기지사는 며칠 전 한 라디오에서 “청산해야 할 사람과는 통합하자, 포용하자 할 수 없다”며 “정리할 건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진정한 통합의 길”이라고 했다. 국내 일부에선 프랑스 비시 정부 시절 나치 부역자 청산을 모범 사례로 들며 거든다. 하지만 그 나라에서도 실제로 벌어진 것은 내 편 봐주기와 네 편 처단이었다.

지지자들에게 적폐를 쓸어버리는 게 진정한 통합이란 주장은 사이다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다른 말을 한다. 큰 도약을 이룬 나라들을 보면 “이런 사람들과도 화해하고 통합을 추진했나” 싶은 사례가 더 많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만 그랬던 게 아니다. 150여년 전 일본은 그때까지 실권이 없던 왕을 옹립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우리로 치면 역성혁명에 해당하지만 유신 세력은 패배한 도쿠가와 가문을 몰살하지도, 막부 신료들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정세가 안정되자 도쿠가와 가문에 총리직까지 제안했다. 도쿠가와 측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고사해 무산됐지만 국민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권력 잡았다고 관직을 독차지하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막부는 사실상 중앙정부였고 도쿠가와의 가신 중엔 유럽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가 많았다. 비록 정권은 타도됐지만 인재까지 내치는 것은 국가적 손해였다. 3만명에 이르는 막부 신료 중 희망자 약 5000명을 메이지 정부 관료로 발탁했다.

우리 국민은 왜 이런 장면에 감동하고 박수칠 기회를 갖지 못하는가. 무엇보다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들이 앞장서 편 가르고 적폐 놀음 하는 탓이 크다. 좌우가 번갈아가며 그렇게 했다. 전후 프랑스에 불어닥친 청산의 광기를 중단시킨 주인공은 프랑스 국민이었다. 적폐 몰이에 열중하던 공산당과 사회당에 사실상의 선거 패배를 안김으로써 9년에 걸친 칼춤을 잦아들게 했다. 우리에겐 왜 통합의 멋진 드라마가 없느냐며 지도자를 탓하기 전에 국민이 정치인들의 편 가르기 유혹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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