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권모 칼럼]'이낙연 사면론'이 십리도 못 간 까닭

양권모 편집인 입력 2021. 1. 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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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쯤이면 ‘말한’ 사람이 정말 뻘쭘하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엊그제 신년 회견에서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사면 논란에 확실히 선을 그었다. “선고가 끝나자마자 사면을 말하는 것은 비록 사면이 대통령 권한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국민의힘조차 조심스러워하는 두 전직 대통령(이명박·박근혜)의 사면을 신년 벽두에 꺼낸 정치인이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문 대통령은 또 “국민이 사면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사면이 통합의 방안이 될 수 없다”고도 했다. ‘사면=국민통합’의 논리를 공박한 꼴이다. 예상보다 세게 ‘이낙연 사면론’에 쐐기를 박았다.

양권모 편집인

다르면서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사면 정치’ 선례가 있다. 1997년 15대 대선을 100여일 앞둔 9월1일,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는 두 전직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의 ‘추석 전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전격 발표한다. 급락한 지지율을 반전시키기 위해 충격요법으로 사면 카드를 뽑은 것이다. ‘대통합정치’를 명분으로 앞세웠다. 한데 예상을 깨고 청와대가 곧장 수용 불가 입장을 공개 천명해버렸다. ‘역사 바로 세우기’로 전·노를 직접 단죄한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선거용”으로 덫칠된 사면 건의를 받아들이는 건 자기부정에 가까웠다. 당시 YS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거부 이유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전·노 사면’은 15대 대선 직후 임기 말 현직 대통령(김영삼)과 미래 대통령(김대중 당선자)의 협의를 거쳐 이뤄지게 된다.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은 피해자이자 민주화 당사자인 DJ와 YS가 용서와 관용을 설파했기에 국민적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는 ‘전·노 사면’이 국민통합의 기제로 승화될 수 있었다.

반면 피해자도 당사자도 아닌 이낙연 대표가 추동하는 사면론은 애초 그런 힘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 당장 “촛불을 들고 탄핵한 건 주권자인 국민인데 왜 당신이 나서 사면 운운하느냐”는 항변에 밑동이 흔들린다.

이 대표가 꺼낸 사면론은 지지율 하락을 막고 중도층 외연을 확대하기 위한 정치적 승부수의 측면이 분명 있을 터이다. 그 못지않게 본디 통합론자인 이 대표의 “국민통합을 열어야 한다는 충정”으로도 이해된다. 하지만 극단의 정치와 진영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사면을 통해 국민통합을 추구한다는 기치가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오히려 “어제까지 밴댕이 소갈딱지 없는 정치를 하다가 갑자기 사면 카드를 꺼낸다고 포용과 통합으로 보이겠느냐”(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는 일갈이 정곡을 찌른다.

사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의 크기는 중도층의 수용 여부에 좌우될 터이다. 한국갤럽의 8일 여론조사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에 대해 중도층(찬성 33%, 반대 58%)과 무당층(찬성 38%, 반대 50%)에서 반대가 찬성보다 많았다. 선의를 앞세우더라도 정치적 타산을 위해 사면을 이용하는 것으로 비치는 순간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 사면론 제기 이후 이 대표의 지지율이 산사태를 맞고 있는 이유다.

사실 전직 대통령 사면과 국민통합을 연결짓는 것부터가 낡은 정치문법이다. 젊은 세대들은 사면이 아니라 최고권력자에게도 법의 정의가 공평하게 적용될 때 국민통합이 이뤄진다고 본다.

헌정질서파괴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과하지도 않는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에 국민적 공감대가 마련될 리 만무하다. ‘국민 공감대’를 대전제로 내세운 문 대통령은 앞으로도 사면을 하고 싶어도 쉬이 하지 못할 것이다. 대표적 통합론자인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지난해 5월 퇴임 기자회견에서 “사면을 겁내지 않아도 될 시간이 됐다”면서도 “문 대통령의 성격을 아는데 (노무현 청와대) 민정수석 때 태도를 보면 아마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법적 절차와 원칙, 국민적 합의를 중시하기 때문에 정치적 결단으로 사면을 단행하지 못할 것이란 예단이다.

신년 회견에서 ‘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 고민을 함께 하고 있는지’를 묻는 뾰족한 질문에 문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국민 공감대에 토대하지 않는 일방적 사면권 행사는 어렵다. 개인적으로 어려울 뿐 아니라 그게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낙연의 기세찬 사면론이 십리도 못 가 발병 난 것은 그 ‘시대적 요청’을 문 대통령과 다르게 봤기 때문일 것이다.

양권모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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