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빠르게 기록 알려주는 '인간 레코드북'.."여자니까 못한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봤다" ['유리천장' 뚫은 킴 응, 한국 야구에도 있다 (5)]
[경향신문]
딱 1년 전,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프로야구의 진짜 스토브리그를 후끈 달군 때가 있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야구단 드림즈 구성원 중 하나로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여성 운영팀장’ 이세영이 등장한다.
연봉 협상을 하자며 단장을 유흥업소로 호출한 무례한 선수에게 야무진 말투로 따져 묻다 소맥잔을 집어던져 정의를 구현하던 화끈한 캐릭터는 많은 야구팬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았다. 당시 KBO리그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이 캐릭터는 뜨거운 화제였다. ‘최초의 여성 팀장’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남정연 홍보팀장(44)은 KBO 최초의 여성 팀장이다. 2001년 입사해 이제 3월이면 정확히 20주년 근속을 채우게 되는 21세기 KBO의 산증인이다. 기획팀과 운영팀에서 약 1년씩 근무하고 나머지 18년을 홍보팀에 몸담았다. 2018년 팀장으로 승격하면서 야구·축구·농구·배구를 통틀어 한국 프로스포츠 최초의 여성 홍보팀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여성 차별이 아닌 차이로 인해서
할 수 없는 부분 분명히 있었지만
의욕 갖고 일하다보면 기회 생겨
KBO 홍보팀의 업무는 큰 맥락으로 나누면 두 가지다. 언론과 팬을 상대하는 대외 업무와 기록 관리 업무다. 특히 프로야구는 경기 중 일어나는 모든 순간이 기록화되는 스포츠다. 모든 기록을 정리하고 분류하며 미디어를 통해 정확히 알려지도록 관리하는 일은 KBO 홍보의 숨겨진 주요 업무다. 남정연 팀장은 그중 KBO 기록의 대표자였다. “KBO 기록은 남정연에게 물으라”는 조언 한 번 들어보지 않은 기자가 드물 정도로 야구 기자들 사이에서는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기록을 찾아 알려주는 ‘인간 레코드북’이기도 했다.
한국의 프로야구는 그라운드와 더그아웃의 모든 구성원이 남성으로 이뤄져 있다. 야구단에 여성 프런트가 등장한 지는 꽤 됐지만 그들이 사무실 아닌 현장에 직접 파견돼 선수단과 함께 움직인 지는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남정연 팀장은 “과거에는 현장에 파견될 일이 많지 않아 자연스럽게 기록과 보도자료 업무 위주로 맡았고 오랫동안 하다 보니 ‘빠르다’는 칭찬도 종종 들은 것 같다”며 “분야의 특성상 성차별이 아닌 차이로 인해서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게 아쉬운 시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항상 욕심이 나서 ‘난 여자니까 못 할 거야. 안 해야지’ 하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다. 오히려 의욕 갖고 일하다 보면 또 해보고 싶은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기까지
친구들 연락 끊길 정도로 일해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수 있도록
바른 모습으로 남는 것이 목표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기까지 유일한 비결은 성실함이었다. 야구계에서 KBO 홍보팀은 매일 가장 일찍 불을 켜고 가장 늦게 불을 끄는 곳이다. 남정연 팀장은 “예전에는 한 달에 3주 야근 체제로 일해서 젊을 때 친구들과는 지금 연락이 거의 끊어졌다. 대신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분들과 새로운 친구가 많이 됐다”며 “팀장이 된 뒤 지금은 매주 야근을 하지만 이제 직원 수도 많아졌고 기술도 좋아져 효율적으로 편하게 일한다”고 말했다.
야구를 좋아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KBO 혹은 프로야구단 입사를 꿈꾸고 있다. 미래의 후배들을 향해 남정연 팀장은 “야구를 좋아하고 잘 아는 것이 도움은 되겠지만 전부가 돼서는 안 될 것 같다. 구단도, KBO도 산업화를 향해 움직이고 분야도 매우 다양해졌다. 야구라는 종목을 통해 어떤 일을 하고 싶고 할 수 있을지를 잘 생각하고 접근해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오랜 홍보팀 업무를 하면서 가장 개선돼야 할 점으로는 리그의 팬서비스를 꼽았다. 남정연 팀장은 “야구가 사랑받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경기력과 팬서비스라고 생각한다. 선수들의 경기력이 향상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공정성과 정확성으로 뒷받침하려 KBO가 더욱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롤모델이 없었기에 자신이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수 있도록 바른 모습으로 남는 것이 목표이자 소망이다.
남정연 팀장은 “요즘에는 입사 지원을 받으면 여성 지원자가 절반은 될 정도로 늘었고 빼어난 분들도 많다”며 “최초의 여성 팀장이라는 수식어가 굉장히 부담스럽다. 다만 경력만으로 팀장이 됐다는 평가를 남에게서 듣지 않도록 일해야 하는 것이 내 사명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은진 기자 muldero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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