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같은 단원들, 알바하며 버틴다니..가슴이 찢어집니다

문학수 선임기자 2021. 1. 1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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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 필하모닉 김홍기 단장에게 물은 '코로나 1년'

[경향신문]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김홍기 단장은 ‘코로나 19’로 힘겨웠던 지난 1년간을 털어놓으면서 정부의 지원을 호소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외환위기 때도 80회 연주회 했는데
작년엔 띄어앉기·비대면 35회
45명 모두 상근 정단원으로 운영
예금 깨고 친구 도움에 버텼지만
이제 더 이상 갈 곳 없는 벼랑

국내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 1년을 맞았다. 지난 한 해 동안 공연계가 받은 타격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중에서도 민간 예술단체는 우려할 만한 상황에 처해 있다. 국공립 기관과 단체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재정으로 유지되지만 민간 단체는 사실상 자영업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단원 숫자가 많은 곳, 지난 수십년간 활발하게 활동해온 단체일수록 ‘코로나의 악몽’을 더욱 실감할 수밖에 없다.

“아내의 예·적금을 깨고 친구들 도움을 받아가면서 1년을 간신히 버텼죠.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벼랑입니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지난 18일 만난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김홍기 단장은 ‘1년간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창단 직후 외환위기를 맞아 오케스트라 운영이 쉽지 않았던 적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과 비교하면 천국이었다”고 했다. “1997년 창단해 그해 겨울에 외환위기를 맞았죠. 그래도 1998년에 연간 80회 가까운 연주회를 치러냈습니다. 20여년간 오케스트라를 운영해오면서 지난 1년과 같은 악몽은 처음입니다. 35회의 연주회를 겨우 진행했는데 그마저도 ‘띄어앉기’나 ‘비대면’으로 하다보니, 공연을 하면서 계속 손실을 감수하는 상황의 반복이었습니다.”

올해 창단 24년째를 맞은 프라임 필하모닉은 국내 민간 오케스트라 중에서 괄목할 만한 악단으로 꼽힌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반주 악단으로 활동을 시작한 후 수많은 발레와 오페라 공연에서 연주했다. 또 별도 정기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을 만나왔다. 예술의전당이 매년 주최하는 ‘교향악 축제’에서 가장 많이 공연한 민간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더 눈길을 끄는 지점은 이 오케스트라가 ‘45명의 정단원’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단원들 월급과 4대 보험 등을 연주회 수입으로 감내하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대개의 민간 단체들이 직접 고용보다는 ‘객원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 단장은 “상근 정단원들이 동료 의식으로 뭉쳐 있어야 숙성된 연주가 나온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저도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 오랫동안 맞춰온 일사불란한 호흡, 그런 것들이 전제돼야 높은 퀄리티의 연주가 가능하니까요.”

기본급도 다 못 준다 털어놨을 때
단원들이 보내준 박수소리에
마음속으로 엄청 울었습니다
손해보지 않고 공연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하고 운영비 지원해야

김 단장은 바순을 전공했다. 아내는 바이올린, 딸은 오보에, 아들은 클래식기타를 전공한 ‘음악 가족’이다. 네 식구가 모두 서울예고 동문이다. 딸 예현씨는 현재 프라임 필하모닉의 오보에 연주자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도 엄연히 직장”이라는 김 단장의 지론은 단원들이 웬만해선 ‘사표’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20년 이상 근속 단원이 서너 명, 15년 안팎이 10여명, 그외에도 대부분 7~8년 이상 근속자”라고 했다. 하지만 “정단원들이 상근하는 오케스트라”라는 그의 신념은 지난해 9월경 벽에 부딪혔다. 2019년의 30%에도 미달한, 급락한 매출 탓이었다.

“국내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는 2~3개월쯤 지나면 괜찮겠지 생각했어요.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죠.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어떤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소프라노 조수미씨와 전국을 순회하면서 10회씩 연주하는 것이 저희 연간 매출에서 10%쯤 됩니다. 한국전력이 후원하는 전국 투어도 6~7%의 매출을 차지하죠. 그런데 모든 연주회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마침내 제가 단원들 앞에서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거죠. 그게 지난해 9월이었습니다. 월급날(25일)을 며칠 앞두고 단원들 앞에서 힘들게 입을 열었습니다. ‘20년 넘게 오케스트라를 해오면서 이런 달은 처음이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 달에는 기본급의 75%밖에 지급할 수 없게 됐다’고 털어놨죠. 그런데 갑자기 우리 단원들이 박수를 치는데…. 아, 그때 제가 속으로 엄청 울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지난해 10월 문화체육관광부를 찾아가 지원을 호소했으나 희망적인 말을 들을 수는 없었노라고 했다. 또 연말에는 도종환 의원(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을 찾아가 하소연했다고 했다. 물론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 단장은 “투 트랙 지원”을 호소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일회성이나 단발성 지원도 해야겠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측면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십년간 예술적 역량을 보여온, 그리고 장기적 고용을 유지해온 예술단체들을 심사·선별해서, 그 단체들의 운영비 일부를 지원해주길 간곡히 호소합니다. 그리고 공연 현장에서 판단하기로는 ‘띄어앉기’가 너무 과하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까지 공연장 감염 사례는 없지 않습니까? 기준을 좀 더 완화해서, 손해보지 않고 공연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시길 제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단원들은 어떻게 지내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월급이 줄었을 뿐 아니라 연주회마다 받는 수당도 없어졌기에 단원들 생활이 무척 곤궁할 터였다. 김 단장은 또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자 단원 5~6명이 택배 아르바이트를 한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저한테는 음악계 후배들이고, 어찌 보면 자식 같은 사람들인데….”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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