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의 세상의 저녁] '위안부' 증언 30년

한겨레 2021. 1. 1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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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의 세상의 저녁]일본에서는 히로시마가 아우슈비츠와 나란히 놓인다. 그래서 히로시마에 히로시마-아우슈비츠 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1980년대 후반에는 히로시마 근처 소도시에 아우슈비츠 기념관을 건설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아우슈비츠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일본은 히로시마를 통해 일본인의 희생을 기억하려 하지만, 그들의 전쟁범죄는 기억하기를 거부한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 ㅣ 소설가

지난 1월8일 한국 법원은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일본 정부는 반인권적 위안부 범죄에 대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정의기억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시민단체들은 “인권보호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선구적 판결”이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1965년 일-한 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문제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오래된 말을 끄집어냈다.

일본은 침략전쟁과 함께 아시아 태평양 전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했고, 한국 피해여성들을 모든 지역으로 끌고 갔다. 남한 240명, 북한 219명이 신고등록 되었을 뿐 피해여성의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 연구자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는 한국 피해여성을 최소 4만명에서 최대 20만명으로 보았다. 이처럼 대규모로 여성을 ‘전쟁 성노예’로 만든 국가는 일본뿐이다.

전쟁은 1945년 8월에 끝났지만 피해여성들의 참혹한 상처는 폭력의 역사에 묻혔다. 그들의 묻힌 상처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91년 8월 김학순이 공개 증언하면서였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남북한은 물론 대만 필리핀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서 피해여성들의 증언이 이어져 위안부 전쟁범죄가 한-일 외교 사안을 넘어서서 국제적 관심사로 확산되었다. 이에 1991년 12월 조사를 시작한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을 통해 “조사 결과 광범위한 지역에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고, 일본군이 관여했으며, 전반적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이 행해졌고, 위안소 생활은 참혹하였으므로 사과와 반성을 하며,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일본 정부가 보여준 가장 전향적인 자세였다. 우파세력의 비난에도 전향적 자세가 지속된 데에는 사회당 소속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3당 연립정권의 역할이 컸다.

1995년 7월 무라야마 정부 주도로 설립한 ‘아시아 여성 기금’은 ‘고노 담화’의 후속 조치였다. 기금 모금을 위한 대국민 호소문에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반인도적 성격을 적시했고, 위안부 자료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등 ‘고노 담화’를 이행하려고 노력했으나, 국가 차원의 사죄와 배상이라는 본질적 해결책을 회피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한계는 일본의 주류세력인 우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무라야마 연립정권의 한계이기도 했다.

‘아시아 여성 기금’의 활동을 불편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일본 우파세력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총공세로 전환한 것은 1996년 6월 문부성 검정 결과에 따라 모든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위안부 문제’의 기재가 결정되면서였다. ‘고노 담화’의 실천이기도 한 그 결정을 우파 이데올로그들은 ‘반일본 역사교육’ ‘자학사관’이라고 말로 분노를 표현하면서 우파세력 결집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 최대의 우파단체인 ‘일본회의’가 1997년 5월 탄생했다. 일본회의 결성 멤버였던 아베 신조가 총리가 된 후 일본회의 출신들은 아베 내각의 80% 이상 차지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종교단체에 가까운 정치집단’으로 극우정치를 추동하는 일본회의는 천황 중심 국가체제 회귀를 위한 평화헌법 개정을 주창한다. 그들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숨기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종전 이후 일본의 전쟁범죄를 숨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온 것이 히로시마다. 인류사의 유일한 원폭 희생지인 히로시마는 태평양 전쟁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일본 민족의 고난이 집약된 성지 역할을 해왔다. 히로시마 평화문화재단이 발행한 <히로시마 평화독본>에는 “히로시마는 세계 평화의 메카로 인정받았다”고 쓰여 있다. 매년 수백만명이 참배해온 히로시마는 일본의 미래 세대인 초중고생 대상으로 평화교육 공간의 역할을 한다. 이 거룩한 공간 속으로 일본의 전쟁범죄가 스며들 틈이 없다.

일본 우파 세력에게 ‘위안부 문제’가 눈엣가시인 이유는 피해여성들의 존재 자체가 침략전쟁의 생생한 흔적으로, 어둠에 숨겨진 전쟁범죄를 밝히는 등불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 등불을 완전히 끄기 위한 아베 정부의 회심의 프로젝트가 2016년 7월에 발족된 ‘화해치유재단’이다.

박근혜 정부의 속성을 간파한 아베 정부는 미국의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압력이라는 정치적 에너지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일본 정부의 출연금 10억엔을 위안부 피해여성과 유족에게 지급하는 ‘화해치유재단’을 박근혜 정부로 하여금 만들게 했다. 무라야마 정부가 ‘아시아 여성 기금’을 만들 때에는 ‘고노 담화’를 나름대로 이행하려는 노력이라도 했지만 ‘화해치유재단’의 경우 아베 정부가 한 일은 10억엔의 출연금이 전부였다. 10억엔의 대가는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의 영혼’을 모독하는 그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모독 행위를 아베 정부와 함께 해버린 것이다.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했다”고 생전에 고백했던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일본산고>에서 “나치가 저지른 일을 청산한 독일과 청산하지 않는 일본, 오히려 침략을 정당화하며 초등학교 우리의 어린이까지 전선으로 차출하여 하루에도 수십명 병사를 상대하는 지옥을 연출하고도 마이동풍, 미군이 성폭행을 했다 하여 지금 국론이 뒤끓고 있는 일본, 도대체 일본과 독일은 어떻게 다른가. 가스실과 위안부가 같지 않아 그럴까. 영육이 동시에 파괴되는 위안부가 가스실 참사를 상회하는데도”라고 썼다.

일본에서는 히로시마가 아우슈비츠와 나란히 놓인다. 그래서 히로시마에 히로시마-아우슈비츠 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1980년대 후반에는 히로시마 근처 소도시에 아우슈비츠 기념관을 건설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아우슈비츠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일본은 히로시마를 통해 일본인의 희생을 기억하려 하지만, 그들의 전쟁범죄는 기억하기를 거부한다. 1987년 일본인 평화운동가 그룹이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에 일본 침략의 기록도 전시하라고 청원했지만 거부되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가운데 상당수가 강제노역자였다는 사실을 공식 시인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것도 거부되었다. 교육의 본질은 진실을 밝히는 힘을 기르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들의 미래 세대에게 진실 그 자체를 숨기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은 “일본 땅을 다 줘도 나를 13세 나이로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가슴 에이는 희생이 히로시마의 희생과 만나 서로의 가슴으로 스며들 때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화해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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