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치산, 중국공산당과 월가 자본을 잇다

박민희 2021. 1. 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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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의 시진핑시대 열전]박민희의 시진핑 시대 열전 _15
왕치산 중국 부주석(당시 부총리)이 2008년 6월18일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과 워싱턴 재무부 청사에서 미-중 에너지·환경 협력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시진핑 지도부는 공산당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가장 심각한 기득권 세력이 금융 분야에 있고, 개혁의 최대 난제라고 본다. 하지만 이미 9년차에 접어든 ‘부패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라이샤오민의 천문학적 뇌물 수수가 보여주듯 부패의 깊은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연한 부패의 근본 원인은 공산당과 국유기업에 너무 큰 권력과 자원이 집중된 시스템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진핑 지도부가 막 출범한 2013년 초, 중국에 19세기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중국어판 <구제도와 대혁명>)을 읽는 열풍이 불었다.

‘부패와의 전쟁’을 지휘하며 ‘사실상의 2인자’로 주목받던 왕치산(王岐山)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한 간담회에서 추천한 이 책은 곧 공산당 간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토크빌은 혁명은 가장 낙후되고 압제에 찌든 사회에서가 아니라, 개혁과 번영이 시작되고 시민들이 사회의 문제에 눈을 뜰 때 일어난다고 했다. 왕치산은 중국이 바로 그런 상황에 있다는 ‘경고’를 보내려 했을 것이다. 왕치산이 지휘한 부패와의 전쟁은 초기엔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개혁이 빠르게 진전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시진핑 집권 1기(2013~2018) 동안 왕치산은 ‘호랑이부터 파리까지’(고위관리부터 하급관리까지) 부패관리 수십만명을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프랑스 혁명의 교훈을 들면서 ‘부패와의 전쟁’을 지휘한 왕치산은 역사학자이자 경제 전문가이며, 30년 넘게 미국 경제계와 중국을 이어온 ‘미국통’이다. 1948년 건설부 소속 선임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왕치산은 문화대혁명 시절 산시성 량자허의 척박한 시골로 하방되었다. 고된 노동을 하던 시절 그는 일생을 함께하게 되는 두 인물을 만났다. 한 명은 아내가 되는 야오밍산인데, 1980년대 중국 부총리이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는 야오이린의 딸이다. 1976년 야오밍산과의 결혼으로 왕치산은 ‘태자당’(혁명원로·고위지도자의 자녀)의 일원이 되었다. 한 명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 시기에 고난을 함께하며 평생의 지기가 된 시진핑이다. 시진핑은 왕치산이 살던 동굴집을 찾아와 같은 이불을 덮고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고 한다.

1970년대 왕치산은 산시성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시베이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문혁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1980년대 중국공산당의 농촌정책연구실과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의 연구원으로 농촌 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9년 왕치산은 중국인민건설은행 부총재로 금융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1990년대에 주룽지 총리는 그에게 국유기업 개혁의 핵심 역할을 맡겼다. 이 때부터 왕치산과 미국 월스트리트(월가)의 끈끈한 꽌시가 시작되었다.

1996년 9월 중국건설은행 행장이던 왕치산이 월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의 헨리 폴슨 사장을 찾아가 중국 최대 국유통신기업인 차이나텔레콤(中國電信)의 기업공개(IPO)를 논의했다. 차이나텔레콤 상장에 뒤이어 많은 중국 국유기업들이 월가 투자은행들과 손잡고 미국 증시에 상장해 자금을 모았다. 곧 월가 금융자본가들에게 중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1970년대 미국의 노동운동이 강해지고 임금이 오르자 미국 자본가들은 노동집약형 산업을 중국으로 이전하고 자신들은 고수익이 나는 금융과 기술에 집중하는 쪽으로 구조조정을 했다. 중국은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한 수출산업에 의존해 급성장하는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이런 분업구조에서는 가장 큰 이윤이 미국의 자본가들에게 흘러가고, 중국공산당 지도부, 관리, 자본가들도 엄청난 부를 챙겼다. 특히 수출지향 경제에서 막대한 부를 얻는 중국 중앙정부, 연해지역 지방정부, 수출기업 경영자들과 미국 월가 자본가들 사이에는 긴밀한 ‘공생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에서 왕치산은 중국과 미국 특히 월가의 금융자본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왕치산과 가까운 월가 금융계 인사들은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수 있도록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8년 부총리가 된 왕치산과 미국 재무장관 헨리 폴슨은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양국 경제 문제 논의를 주도했다. 흥미로운 것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오만해진 왕치산의 태도다. 당시 미국을 방문한 왕치산 부총리는 헨리 폴슨을 만나 “당신은 나의 스승이었지, 그렇지만 지금 당신네 시스템을 보게, 우리가 더이상 당신들로부터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말했다고 폴슨은 회고록 <중국과 협상하기>에서 썼다.

시진핑 시대 ‘부패와의 전쟁’ 총사령관으로서 무소불위의 지위에 오르는 듯 보였던 왕치산은 2017년 정치적 곤경에 빠졌다. 미국에 망명 중인 중국 재벌 궈원구이가 왕치산 일가가 하이난항공그룹(HNA)을 이용해 거액의 재산을 부정 축재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왕치산이 배우 판빙빙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주장도 내놨다. 그해 10월 19차 당대회를 앞둔 권력투쟁 속에서 시진핑-왕치산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궈원구이를 통해 정치적 공격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왔다.

2017년 말 당대회에서 당시 69살의 왕치산은 ‘7상8하’(七上八下·68세부터 은퇴)의 비공식 규정에 따라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났지만, 이듬해 3월 국가 부주석으로 화려하게 복귀해 주목을 받았다. 왕치산이 공산당의 당직은 내놓았지만, 사실상의 2인자로서 미-중 관계를 비롯한 대외정책을 지휘할 것이라는 전망이 파다했다.

2016년 3월3일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열린 인민대회당에서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시진핑 국가주석과 이야기하고 있다. 베이징/신화 연합뉴스

하지만 이후 ‘2인자의 행보’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왕치산 부주석은 2019년 7월 멕시코 외무장관을 만나 “나는 주석을 도와서 약간의 의례성 외교를 하는 책임이나 맡고 있다”고 했다. 언뜻 시진핑에 대한 충성을 얘기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이 묻어난다. 중국 정치 전문가인 안치영 인천대 교수는 “왕치산은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남으로써 실권을 잃었다”며 “다만 왕치산이 ‘부주석’ 직함을 가지게 된 것은 2018년 개헌을 통해 주석 임기 제한을 폐지한 시진핑이 두번째 임기가 끝나는 2022년에 연령에 관계없이 국가주석직을 계속 더 할 수 있다는 현실적 근거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안 교수는 “시진핑 입장에서는 태자당의 일원이고 영향력이 막강한 왕치산이 계속 상무위원에 남아 있으면 강한 견제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그를 의전적 역할로 물러나게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왕치산의 역할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도 컸다. 2018년 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하며 중국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왕치산 부주석은 오랜 친분이 있는 월가 거물들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 의지해 ‘돈으로 트럼프를 사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2018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미국 금융원탁회의’에서 왕치산은 월가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만나 ‘중국이 미국 금융기관들에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11월 초 왕치산은 싱가포르를 방문해 신경제포럼에서 헨리 폴슨을 다시 만났고, 11월8~9일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베이징으로 초대해 조언을 구했다.

이번에는 왕치산의 30년 월가 인맥의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 안에서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이 월가를 대표해 중국과 타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지만, 강경파의 중국 때리기가 점점 더 힘을 얻었다. 그 결과 왕치산 부총리가 막후에서 미-중 관계를 조정해나갈 동력이 사라졌고, 류허 부총리가 미-중 무역협상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주목할 점은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고 미국 내에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한 뒤에도 월가의 자본가들은 중국공산당의 가장 강력한 우군으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2019년 2월 미-중 무역협상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류허 부총리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솔로몬 등 월가의 거물들을 모아놓고 중국에서 미국 금융회사들이 더 큰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보도했다. 실제로 2019년 하반기부터 중국은 외국자본에 금융 분야 개방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외국기업이 중국 내 금융기업을 세웠을 때 지분의 50% 이상을 가질 수 없도록 했던 해묵은 제한도 풀었다. 월가의 금융기업들은 중국으로 몰려가고 있다. 2020년 3월 골드만 삭스와 모건 스탠리는 중국 금융규제당국으로부터 중국 국내 사업에서 51% 지분을 가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고, 12월8일 골드만 삭스는 중국 합자회사 지분 100%를 매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금융 분야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중국에서 외국 금융기업이 100% 지분을 갇게 되는 것은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중국건설은행,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홀딩스와 제휴해 중국 내 자산운용 사업에 진출한 데 이어 2020년 8월 초엔 독자적인 뮤추얼펀드 사업 허가를 받았다.

중국공산당은 미-중 디커플링을 막고 달러도 확보하기 위해 월가를 끌어들이는 한편, 국내에서는 금융 분야의 기득권층을 겨냥한 숙청을 가속화하고 있다. 2017년 덩샤오핑의 손녀사위로 유명했던 우샤오후이 안방보험 회장이 부패 혐의로 체포돼 18년형을 선고받은 것은 신호탄이었다. 지난 1월5일에는 국유 금융기구인 화룽자산관리공사의 라이샤오민(賴小民) 전 회장이 불법적으로 총 17억8800만위안(약 3044억원)의 뇌물 수수와 횡령을 저지르고 100명의 내연녀를 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틀 뒤에는 중국개발은행의 후화이방 전 회장이 8552만위안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시진핑 지도부는 공산당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가장 심각한 기득권 세력이 금융 분야에 있고, 개혁의 최대 난제라고 본다. 하지만 이미 9년차에 접어든 ‘부패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라이샤오민의 천문학적 뇌물 수수가 보여주듯 부패의 깊은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연한 부패의 근본 원인은 공산당과 국유기업에 너무 큰 권력과 자원이 집중된 시스템 자체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감시할 시민사회의 역할은 오히려 더욱 억압되고, 부패와의 전쟁은 반대파에 대한 숙청으로 변질되었다. 국내에서 부패한 금융자본가 처벌이 요란하지만, 미-중 갈등에서 중국공산당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 중국 금융 기득권과 결탁한 월가 자본가들이라는 역설이 중국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박민희 ㅣ 논설위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중국 인민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중국과 이란>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혐중’에 반대한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희망한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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