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얼굴이 공개된 값 / 권김현영

한겨레 2021. 1. 1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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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출처 unsplash.com

권김현영 ㅣ 여성학 연구자

우연히 일상에서 연예인을 마주쳤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분도 같이 끄덕여줘서 무심히 지나쳤는데 곧 깨달았다. 나만 아는 사람이었다는 걸. 무안하지 않게 같이 인사해주다니 친절한 사람이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라고 당연히 인사를 하다니 얼굴을 안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얼굴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넓은 의미에서 ‘아는 사람’이 된다. 누가 ‘그 사람 알아?’라고 물으면 ‘응, 얼굴만 아는 사람이야’라고 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얼굴을 알면 일단 더 이상 완전히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앎의 시작이 된다. 그런데 그 앎이 마지막인 경우도 있다. 이번 겨울에 알게 된 두 명의 얼굴이 그랬다.

지난겨울 따뜻한 나라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 여성이 경기도 포천의 농장에서 일하다 영하 16.6도의 날씨에 비닐하우스로 제공된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추위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생의 마지막 날이 무척이나 추웠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숙소의 차단기 스위치가 고장 나 난방장치가 계속 꺼져서 밤새도록 스위치를 돌아가면서 올렸다고 했다. 겨울철 따뜻한 밥상 위에 올라온 채소와 과일들은 높은 확률로 농어촌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이 투여된 결과라는 걸 이번 겨울에 처음 실감한 사건이었고, 따뜻한 나라에서 와서 기록적인 한파 날에 사망하다니 그 대비가 비극적이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마 그 정도의 감상을 남긴 채 오래지 않아 잊힐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름을 알게 되고 얼굴을 알게 되니 달랐다. ‘이주노동자 기숙사 산재사망 대책위원회'에서는 이 죽음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고인의 얼굴 사진과 이름을 공개했다. 이름은 속헹, 향년 31세였다.

또 하나의 사건은 잔혹한 폭력과 학대로 아기가 숨진 ‘정인이 사건’이다. 정인이는 입양된 가정에서 5개월 동안 학대를 당한 끝에 16개월의 삶을 마쳤다. 세 차례의 신고가 이루어졌으나 끝내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숨졌다. 피해 아동이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학대가 매우 가혹했다고 알려지자 여론은 격분했고, 이를 계기로 국회에서 아동학대 관련 법률 개정안이 쏟아졌다. 아동학대 피해지원을 해온 김예원 변호사는 형량 강화와 즉시분리 같은 정책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며 여론에 떠밀려 실효성 없는 “이런 식의 법안들이 통과되면 정인이 얼굴이 공개된 값어치가 전혀 없어진다”고 말했다. 다행히 현장을 잘 아는 전문가의 의견에 많은 이가 공감했고 문제되는 법안도 일부 수정되었다. 하지만 이게 얼굴이 공개된 값에 미칠 리는 없다.

정인이 사건이 보도되자마자 학대 정황이 의심되는 시시티브이와 가족사진 등이 공개되었다. 이들은 얼굴 없는 존재로 살다가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조건에서 사망했다. 정인의 얼굴은 합의나 동의 없이 공개되었다. 이미 의사를 표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속헹도 마찬가지였다. 타자화의 폭력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도, 이름과 얼굴이 공개된 게 문제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중 삼중으로 지워진 이들에게 ‘타자화’는 때론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우리는 타자화를 통해서만 속헹과 정인의 생전 삶을 유추할 수 있다. 수전 손택은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보는 우리는, 의도했건 아니건 관음증 환자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구경꾼이 아니라 목격자가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가해자의 얼굴 공개는 가해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윤리적 책무를 환기시킨다.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은 피해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책임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가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바꿔 부르자는 이야기는 대부분 옳지만, 피해자의 이름과 얼굴을 이미 알아버린 이상 다시 그 이름을 부르지 말자고 하기보다는 그 앎 자체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아는 얼굴’이 된 이들이 이미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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