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명 칼럼] 얼르고 뺨 때린 삼성재판, 사법부의 분수

노원명 2021. 1. 1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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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2021.1 .18.이충우기자
국회 상임위 회의석상에서 의원들끼리 '존경하는 000의원'하고 부르는걸 듣다보면 가증스러울 때가 있다. 손톱만큼도 존경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이때 존경은 의원 개인보다는 입법이라는 신성한 권능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서로 권위를 추켜줌으로써 더 권위있게 행동한다면 좋은 일이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 법원을 출입하며 여러명의 판사를 만나보았다. 술버릇이 고약한 판사도 있었고 인격적 매력이 결여된 판사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점잖고 신사다웠다. 그가 주사꾼이든, 신사든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는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깍듯이 호칭한다. 이 역시 너무 아니꼽게 생각할 필요없다. 사법이 구현해야 할 정의에 대한 존경일 뿐이다. '잘 하라'는 얘기다.

사회가 타락해도 '최종적 권위' 한두개쯤은 남겨두는게 좋다. 그중 하나가 사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법에 권위가 있어야 논란에 끝이 있다. 법원 판결에 여기저기서 엉겨붙는 현상은 구제불능 사회로 가는 징조다. 요사이 한국 사회는 그런 점에서 아주 구제불능이다. 유리한 판결에만 승복하는 자들도 문제지만 권위를 지키지 못한 사법부도 문제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법정 구속한 파기환송심 판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으니 실형이 나올 가능성은 처음부터 높았다. 다만 파기환송심 과정에서 재판부가 보인 행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좀 있다.

2019년 10월25일 첫 공판에서 정준영 부장판사(재판장)는 "만 51세에 이건희는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재용의 선언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심리 기간에도 당당히 기업총수로서 일하라"라고 이재용을 '훈계'했다. 이런 훈계는 법조 출입기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정 부장판사는 1967년생으로 이재용 부회장보다 한 살 위다. 평생 법관만 한 그는 구멍가게 하나 경영해 본 적이 없다. 누구를 고용한 적도, 월급을 준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애플, 구글과 경쟁하고 수십만 종업원 생계를 책임진 글로벌 기업 총수에게 '이재용의 선언'을 묻고 '당당한 기업총수'의 자세를 주문했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자상함인가, 오지랖인가. 자신감인가, 분수 망각인가.

훈계에만 그친 것도 아니다. 정 부장판사는 피고석의 이 부회장에게 '실효적 준법감시제도'를 제안했다. 친절하게도 "미국에선 준법감시제도가 실효적으로 운영되면 처벌을 낮춰준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당장 진보 시민단체에서 문제삼고 나왔다. 경제개혁연대는 "본격적 심리에 앞서 재판장이 기업인 출신 피고에게 경제·경영에 대한 구체적 조언과 당부를 한 것은 향후 재판의 공정성 시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적절치 못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박영수 특검은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다.

재판부가 '이렇게 하면 봐 줄수 있다'는 식으로 코치하는데 그걸 따라하지 않을 피고는 없다. 삼성은 준법감시위를 출범시켰다.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대국민사과를 하고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무노조 경영도 포기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1년이 더 지나 "삼성 준법감시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이재용을 구속시켰다. 삼성이 청한 것도 아닌데 '준법감시위' 아이디어를 툭 던지고 그렇게 하도록 만든 뒤에 '이거 내가 말한 기준에 못미치는데···'하고 입 닦아버린 것이다. '얼르고 뺨 때린다'는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다.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삼성에 사실상 강제한 조치들로 인해 삼성이 치를 비용이 얼마인지, 장래 삼성과 한국 경제에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삼성으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담당 재판장이 그걸 원했으므로. 그가 목줄을 쥐었으므로. 구멍가게 한번 경영해본적 없는 대한민국 부장판사는 그렇게 세계 최대 IT기업중 하나인 삼성과 국가경제,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개입했다. 그 결과는 정말 가늠도 안된다.

이재용을 구속시키고 말고는 재판부가 결정할 일이다. 법과 양심대로 하면 된다. 이재용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넘어서는 일을 했다. 학창시절 공부좀 했다고, 힘있는 자리에 있다고 그런 식으로 훈수해선 안된다. 우리가 '존경하는 재판장'이라고 하는 것은 법에 대한 공정한 해석과 양심을 독려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러주는 것일뿐 판사가 대단한 존재여서도 아니고 그를 존경해서도 아니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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