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편견 딛고 피어난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의 꿈

남지은 2021. 1. 1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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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일 국립극장 음악극 '명색이 아프레걸']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이야기 다뤄
김광보 신임 국립극단 예술감독 연출
지난 1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서 있은 <명색이 아프레걸> 리허설 모습. 국립극장 제공

“안 된다는 말,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내한테는 된다는 거보다 안 된다는 게 훨씬 많거든. 이제 누가 안 된다 카면 저걸 하라 카는 소리구나 그칸다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에게 ‘안 된다’는 ‘된다’와 같은 말이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그에게 대학교 기숙사 사감은 “여자가 어떻게 영화감독을 하느냐. 안 된다”고 했고, 고교 시절 교장은 “여자는 여자의 일이 있다. 일본 예술대학 유학은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박남옥은 ‘아, 하라는 소리구나’ 하며 “지금 안 되면 나중에 하면 되지. 두고 보이소!”라며 때를 기다렸다.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영화를 보러 가서 만난 지인을 통해 기회를 얻어 만든 <미망인>으로 결국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 된다.

박남옥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아이를 업고 일하는 모습. 국립극장 제공

격동의 시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한 박남옥 이야기가 새해 음악극 <명색이 아프레걸>로 1월20~24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오른다. 1954년 6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그가 유일하게 남긴 영화 <미망인> 작업 과정을 중심으로 여성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을 조명한다. ‘아프레걸’은 6·25 전쟁 이후 등장한 주체적인 여성을 지칭하는 당시 신조어다. ‘국립극장 기획전’으로 지난해 6월부터, 12월 개막을 목표로 준비했는데 코로나19 사태 확산으로 미뤄졌다. 김광보 연출은 지난 16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하도 안 된다고 하니 해야겠다는 말이 재미있으면서도 의미가 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강인한 여성상이 깊게 와닿았다”고 말했다.

박남옥을 연기하는 김주리. 국립극장 제공

사실, 주체적인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마리 퀴리> <호프> 등을 통해 구현한 여성 서사는 한동안 무대 위 화두였다. 박남옥 감독의 삶이 도드라지는 것은 주체적 여성을 특별한 존재처럼 그리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그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광보 연출은 “이분의 예술이라는 것은 우아하고 특별한 게 아니라 생활과 맞닿은 부분이라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고 했다. 아이를 업고 “레디고!”를 외치고, 제작비를 아끼려고 자기 집에 세트장을 꾸미고, 직접 밥을 해서 스태프를 먹였다. 김광보 연출은 “처음엔 박남옥 감독을 잘 몰랐다. 고연옥 작가가 박남옥 감독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자료를 찾던 중 아기를 업고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게 됐다. 굉장히 강렬해 그 사진 한장만으로도 박남옥 감독의 삶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김광보 연출과 고연옥 작가는 2001년 <인류 최초의 키스>를 시작으로 20년간 호흡을 맞췄다. 고연옥 작가는 박남옥 감독의 삶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한 지난 6월 이후부터 미국에 있는 그의 딸과 전화로 소통하며 생생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박남옥 감독이 만든 영화 <미망인>의 한 장면. 그의 자필 메시지가 써있다. 국립극장 제공

아이 맡길 곳조차 없는 박남옥 감독은 무수한 차별과 편견 속에 살았다. 여자라고 지방 로케이션도 빼놓고 가던 시절이다. <미망인> 녹음을 빨리 진행해달라고 하자 녹음기사로부터 “정초부터 재수 없게 여자가 설친다”는 악담을 들어야 했고, 일부는 그를 감독이 아닌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1955년 서울 중앙극장에 <미망인>이 걸린 것 자체가 어쩌면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견과 싸우면서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영화감독의 이야기지만, 이 사회를 사는 여성의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김광보 연출은 “연극의 강유정 연출 등 어느 분야든 박남옥 감독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여성 예술가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온 것 아니겠냐”며 “이 작품을 보며 그들의 고난과 영광을 곱씹어보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공연장 방역 지침에 따라 ‘좌석 두 칸 띄어앉기’로 진행된다. 예매 및 문의는 국립극장 누리집(www.ntok.go.kr)과 전화(02-2280-4114)로 하면 된다.

<명색이 아프레걸>을 연출하는 김광보 연출. 국립극장 제공

김광보 연출은 지난해 11월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임명됐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10년 만에 합동으로 준비한 공연이다. 박남옥은 창극단 배우 이소연과 객원 배우 김주리가 번갈아 맡는다. 그는 “국립극장과 국립극단의 협업을 시도해보고 싶었는데 공교롭게 이 작품이 시작점이 됐다”며 “지난해 8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때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되더라도 이 작품은 연출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김광보 연출은 18일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서 2021년 계획을 발표했다. 신진 연출과 작가를 발굴하는 ‘창작공감’을 신설하고, 예산 10억원을 배정해 온라인 극장을 정식으로 개설할 예정이다. 누구나 연극을 즐길 수 있게 ‘배리어프리 프로덕션’을 운영한다. 올해는 지난해 밀린 4편을 포함해 작품 총 20편을 선보인다. <로드킬 인 더 씨어터> <엔젤스 인 아메리카>가 특히 눈길을 끈다. 김광보 연출은 “두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이 동시대 새로운 담론에 접근한 국립극단의 올해 방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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