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표절당한 자의 죽음

한겨레 2021. 1. 1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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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정희진의 융합 _15
절도범은 처벌받지만 표절범은?
당대 표절은 다운로드와 절취(竊取)
동시에 가해자가 피해자를 매장
표절은 노동을 조롱하는 문화
쓰기는 최고의 앎의 방식
쓰는 노동 없이 지식은 생산될 수 없어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예전 <한겨레>에 ‘정희진의 어떤 메모’를 연재한 적이 있다. 그때보다 지금 독자 메일을 많이 받는다. 그들의 반응은 내게 한국 사회에서‘는’ 융합을 논하기 전에,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조금 과장하면, 나는 융합 관련 글을 시작도 못 한 것이다. 조리할 지식의 규모 자체가 적은 데다 이미 상해 있다면, 지식의 생산 과정부터 점검해야 한다.

방송인이나 정치인의 학위 논문 표절은 일상의 뉴스다. 청문회에서 표절이 문제 되지 않은 이들은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 사회는 표절을 관례(ritual)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통과 의례(ritual, ‘儀式’)도 있다니! 의례가 아니라면, 이 관대함을 설명할 길이 없다.

대개 표절을 윤리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표절로 받은 학위를 근거로 방송에 나와 큰돈을 벌거나 그것이 평생 고용의 근거가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 거래 행위가 아니므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연예인과 정치인의 학위는 장식이나 노후 보장용일지 모르지만, 설민석씨의 경우나 표절로 쓴 학위 논문으로 고용되었다면 사용자 측까지 모두 피의자다. 학계의 표절은 대중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횡행한다. 관련 전공자들은 알고 있지만 동료를 고발해서 좋을 일이 없다.

표절과 절도의 차이

표절(剽竊)의 ‘표’는 표(票)와 도(刀)를 합친 말이다. 그래서 표절은 칼을 들이대고 물건을 뺏는 도둑, 표적(剽賊)이라고도 한다. ‘절’(竊)은 구멍 혈(穴)과 쌀 미(米)를 중심으로 벌레가 쌀을 곡식 창고에서 훔쳐 먹는 장면을 그린 상형문자다.

보석을 훔치면 절도인데, 글이나 예술 작품은 도둑질이 아니라 표절이라고 한다. 왜일까? ‘표’는 각종 종이(입장권, 비행기표, 투표 등)를 뜻한다. 종이와 글자는 지식의 상징. 무엇을 훔치는가에 따라 절도범의 품위도 달라진다. 하지만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표절이 훨씬 쉽다. 표절범도 지식인 근처에 있어서인가?

표절의 개념과 방식은 생각보다 넓다. 미술이나 영화의 오마주나 ‘예술적 의미를 목표로 한 의도적인 모방’은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다. 문제는 글, 특히 학위 논문이나 소설처럼 돈과 직접 연결되는 장르다. 최근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출마한 문대성씨처럼, 박사 논문을 통째로 다운로드하는 경우는 뭐라고 해야 할까. 종이 낭비 없는 노동 절약형, 환경 친화형 표절?

프레임 표절도 있다. 타인의 책을 다운로드한 후, 단어만 바꿔치기하는 경우다. 나는 프레임 표절의 피해자가 된 적이 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저자’가 표절한 내 책으로 내 논지를 비판했다는 점이다. 혹은 이미 상식으로 널리 퍼진 이야기, 가령 “기후변화 대신 기후위기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와 같은 문장을, 자기만의 논리라고 주장하면서 피해자를 자처하는 이도 있다.

외국 자료를 부분 번역해서 자기 글에 슬쩍 넣은 글쓰기는 표절인가, 아닌가. 자신이 한국에서 쓴 석사 논문을 번역, 보충(?)하여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사례도 아주 드물지 않다. 한편, 출처만 밝히면 표절이 아닌가? 타인의 논문을 거의 번역한 다음, 모든 페이지마다 출처를 밝힌 박사 논문도 있다. 이는 번역도 아니고 그냥 표절이다.

위에 여러 가지 사례를 소개했지만 우리 시대의 지옥은 표절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절발지환(竊發之患), 도둑으로 인한 근심. 나는 이 걱정이 더 크다. 표절보다 더한 공포다. 아래 사례가 대표적인데 자세히 쓰기엔 지면이 아까운 데다, 내가 상반기에 섹슈얼리티(성희롱, 군 위안부 운동) 관련 책에 상세히 다룰 예정이라 간단히 적는다. 표절과 섹슈얼리티? 표절은 그만큼 복잡한 외피를 쓰고 있다.

2018년, 학계에서는 지난 십수년간 ‘표절 학자’로 지목된, 그러면서도 진보 인사로 알려진 에이(A)가 비(B)의 연구를 “그냥 가져갔다”. 절취(竊取)한 것이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발주한 연구용역이었는데, B의 자료 수집이 완료된 상태였다. 이후 A는 B의 연구물을 티브이를 비롯, 각종 언론에 발표했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피해자 B가 연구 윤리를 주제로 소속 학회에서 발표했는데, A는 “B에게는 알리지 말고” B의 발표문을 학회 아카이브에서 영원히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A가 각계의 연줄을 동원, B를 직장에서 해고시키면서 ‘종결’되었다. 엉뚱하게 연루된 많은 이들이 함께 직장을 잃었다. 이후 “제2막”은 더욱 믿을 수 없다.

‘영화에서는’ 조직폭력배가 증인을 살해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증인은 대다수가 방관자였거나 “이게 실화냐”라는 멘붕 상태였으므로,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남의 연구를 훔친 사람은 당당하다 못해 상황을 평정하고 연구물을 빼앗긴 사람은 직장을 잃는 사회에서, 지식 생산은커녕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A 사건에서 ‘어른’들은 가해자의 오랜 인맥 관리 덕분에 A를 옹호했고, ‘후학’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자기 연구물이 도둑질을 당해도 항의하고 권리를 찾기 어려운, 아니 두려운 시대다. 나 역시 내 글이 표절당하더라도, 표절 자체보다 표절한 이가 나를 해코지할까 봐 두렵다. 다른 학계나 문학 분야에서는 표절자의 실명을 공개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A’라고 쓰고 있다. 내 안전을 걱정하는 문자가 빗발친다. 왜일까.

공부는 쓰기다

표절이 절도여서 문제일까. 저작권(copyright) 개념에 저항하는 지식 공유 운동인 카피레프트(copyleft)도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어쨌든 간에, ‘좋은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표절의 문제는 간단하다. 인생을 건 총체적 노동을 하지 않아도 쉽게 학위 소지자가 되고, 이들이 지식 생산을 저지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생 공부를 포함해 공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상, 읽기, 여행, 경험과 그 해석, 인간관계, 쓰기…. 나는 공부의 핵심은 “쓰기”라고 생각한다. 외국어 공부에서도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중 쓰기가 가장 어렵다.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모르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 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생각과 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이유는 수학 공부의 이치와 비슷하다. 남이 풀어놓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읽기)과 자기가 직접 푸는 능력(쓰기)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수학 점수가 안 오르는 지름길이다.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진도가 안 나가는 상황이 있는데, 이는 거기서 멈추고 다시 질문해야 한다는 좋은 신호이다. 글쓰기를 정지하고 모든 것을 재점검해야 한다. 쓰다가 길을 잃은 느낌이 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다른 내용을 쓰고 있거나,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사유 틀(‘이론’)을 찾지 못해 ‘이론을 창시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사례가 적절하지 않거나, 애초 문제의식 자체가 틀렸다거나….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모르는 것, 부족한 것을 깨닫고 쓰기를 반복해야 한다. 겪어서야만 깨달을 수 있고,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은 연습(練習)을 거듭한다. 연습을 훈련(訓/練)이라고 하는 이유다. ‘훈’(訓)은 해석, 풀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몸에 도장을 ‘새길 만큼’ 익힌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들의 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글쓰기의 좌절에 익숙한 나는, 완벽한 글은 없어도 완벽한 인생은 있지 않을까라는 망상에 자주 빠진다.

나는 부동산 구입으로 인한 불로소득보다, 표절로 인한 불로소득이 ―내용상으로는― 더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세금도 내고 비난도 받는다. 발품도 팔아야 한다. 표절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다.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이들에게 표절 문화는 우주로 떠나고 싶을 만큼의 절망이다. 새로운 중세가 안착했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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