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는 말했다 "나는 아주 소심한 사람이다"
제29화 한겨레 역대 칼럼니스트 1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1227.html
올 1월의 한반도는 추위의 땅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은 분양 사기 당했던 것 아니냐’ 농담이 돌 정도다. 1989년 9월 정운영 칼럼에는 “단군 할아버지께서 처음 터를 잡으실 때 생각이 고루 미치지 못해 그렇게 되었는지”라는 너스레가 실렸다. 추위는 아니고 부동산 문제에 대한 글이었다. “산림지와 농경지를 빼면” 사람 사는 택지가 얼마 남지 않는 땅인데, 그 좁은 땅마저 소수의 사람이 독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코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고 제 몸뚱이에 불을 그어대고 싸우며 얻어낸 급여의 인상액”보다 “사우나탕에서 땀 빼고 필드에서 골프채 휘두르면서도 토지 소유로 발생시킨 자본수익”이 더 큰데, 장차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 정운영은 걱정했다. 32년 전의 글이다. 미래를 내다본 것 같은 독특한 시선의 칼럼들을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읽어보았다. 해설 김태권
양극화 말한 1989년 5월 칼럼
“어디 산다고 말해야 할 때
이미 쭈뼛쭈뼛해지는 소심증”
“서양보다도 낮은 출산율”
“어차피 외국인력 필요로 할 것”
박노자의 미래 한국 내다본 글
“나는 아주 소심한 사람이다.” 1989년 5월, 박완서 칼럼의 첫머리다. 역시 부동산과 양극화 문제가 걱정이었다. “어디 산다고 말해야 할 때 이미 쭈뼛쭈뼛해지는 것도 나의 못 말릴 소심증이다.” 어째서? “지난 일년 사이에 곱절이나 값이 뛴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서 불로소득한 액수까지 계산하면 내가 속한 사회가 미쳐도 단단히 미쳐 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박완서는 덧붙였다, “도대체 일생을 죽자꾸나 일해도 월세방을 면할 가망이 없는 사람들”의 분노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요새 너무 많이 가진 사람들의 작태를 봐도 미친 것 같은데 너무 없는 사람이라고 미치지 말란 법이 없다. 없는 사람이 중산층에 대해서까지 적의를 갖는 건 요새 갑자기 중산층의 생활이 붕 떠올라 그들이 차근차근 기어오를 수 있는 계단도 온데간데없이 없어진 느낌 때문이지, 그들의 꿈도 결국은 중산층이 되는 것일 것이다.”
<한겨레>의 옛 칼럼을 다시 읽으니 신기하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내다본 글 같다. “서양보다도 낮은 출산율” 때문에 “우리 (사회)는 어차피 외국 인력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박노자는 2005년 8월에 지적했다. 2007년 2월에는 이렇게도 썼다. “한국의 인구는 2050년에 이르러 약 12%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미에서 해 온 것처럼 국내 노동시장을 제한적으로나마 개방해 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일하다가 차후에 좀 더 쉽게 한국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이 글에서 박노자는 고려 역사를 언급한다. “12세기 후반의 고려는 중국인들은 물론 거란, 여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나라였고 13세기에 이르러서는 몽골인을 포함해 귀화인의 총수가 7만명에 이르렀다. 귀화인들의 독특한 풍습까지도 배려해주는 ‘다문화 공인정책’을 편 것은 고려시대 귀화 붐의 현실적 배경이었다.”
이때만 해도 박노자를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비약적이고 감정적이며 부정확한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는 반박 기고가 2005년에 실리기도 했다. 2006년에는 “이제는 박노자 글의 결론이 얼추 짐작된다”는 말도 나온다 했다. 박노자 칼럼에 대한 한국 사회 일각의 거부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은? 박노자가 20년 전부터 해온 이야기들과 비슷한 주장을 이제 우리는 자주 접한다. 불편해하는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만 말이다.
한편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1991년 3월에 정운영은 이런 칼럼을 썼다. “결론부터 미리 꺼내자면 노동력의 수입은 안 된다. 백번 양보해도 때가 이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정운영이 어째서 이런 글을 썼을까? 박노자의 글과 얼핏 달라 보이지만, 꼼꼼히 읽으면 본뜻이 드러난다.
“나는 ‘우리가 수입하려는 대상은 노동하는 소나 노동하는 말이 아니고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를 당부한다. 결국 이 좁은 국토의 어느 한모퉁이를 그들을 위해 할애하거나, 그들의 존재를 전혀 어떤 이질감이 없이 우리 사회의 한 부분으로 포용할 아량이 없다면” 해외 노동력의 수입은 “안이한 발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반세기 전에 지어놓은 관사가 여전히 탄광촌의 숙소로 쓰이는 판국에, 외국 노동자를 위한 주택 건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실정”이라는 정운영의 문장을 읽으며, 얼마 전 비닐하우스에서 숨진 이주노동자의 사연이 떠올라 나는 마음이 내려앉았다. 30년 전에 예견된 비극이었다.
독특한 시선이라면 남재희 칼럼을 빼놓을 수 없다. 2015년에 남재희와 대담을 나누기 앞서, 신진욱은 그를 “보수정권(박정희~김영삼 정권)과 보수정당에 몸담았던 진보 성향의 80대 언론인”이라고 불렀다. 옛날에 장관도 지냈지만 칼럼을 쓰면서는 ‘언론인’이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그다.
모두가 미래를 말하던 2017년 5월의 칼럼에서 남재희는 1960년의 기억을 버르집는다. “4·19 후 과도정부의 수반이 된 허정씨는 ‘혁명적 과업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습하겠다’ 운운했다. 그것이 장면 내각의 시정철학으로 이어진 게 탈이다. 혁명적 개혁이 필요했던 시기다. 혁명적 사태를 적어도 반쯤 혁명적인 방법으로 대응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촛불항쟁의 결과 탄생한 지금 정권은 “준혁명적 상황까지는 아니라도 준준혁명적 상황에 처했다”고 슬며시 덧붙인다. 행간을 읽는 것은 독자 각자의 몫일 터다.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2017년 11월에는 “내 생각으로는 북-미 간의 직접교섭이 불가피하다고본다”는 칼럼을 썼다. 그때는 생뚱맞아 보였지만 평창올림픽을 지나며 정말 이대로 됐다. 2018년에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칼럼은 이렇게 이어진다. “전에 한반도의 ‘핀란드화’가 운위된 적이 있다. 당장 통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맞지 않는 이야기 같다. 남북 간에 평화가 이룩되고 아마 반세기쯤 지나면 남북 간의 체제는 엇비슷해져 국가연합 또는 연방제의 길도 트일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될 때 한반도의 통일된 국가는 동북아에서 당당한 독립된 중위권 국가로 독자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정말 이렇게 될까? 30년 후의 누군가가 <한겨레>의 ‘옛 칼럼’을 꺼내 읽고 확인해주기를 기대한다.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31화 한겨레 역대 칼럼니스트 2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1227.html
▶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개그도 연구합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사진, 기사, 지면 이미지 등의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관련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 사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시즌3인 25~36화는 주로 기업·기업인 이야기로 꾸몄습니다. 주간 연재.
[알림] 한겨레 칼럼니스트를 공모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8326.html
리영희, 정운영, 조영래, 박완서…. 더는 만날 수 없지만 영영 헤어질 수 없는 지성의 이름입니다. 시대의 죽비가 되고, 웃음이, 눈물이 되었던 <한겨레> 칼럼 필자들입니다. 오늘은 또 다른 필자들이 그 자리를 이고 집니다. 이제 <한겨레>는 언론 사상 처음으로 칼럼니스트를 공모합니다. 더 다양한 통찰과 감성을 발굴해 독자와 연결짓길 희망합니다. 희망이 절망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과거가 현재에게, 꿈이 꿈에게,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한칼’, 시작합니다. 함께해주세요.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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