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서 관악산·북한산을 보라.. 거대도시 서울의 압축 歷史를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2021. 1. 19.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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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리스트] [3] 김시덕 - 서울의 山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5

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입니다. 클릭 한 번이면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서울대 건축과 서현 교수의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 강호동양학자 조용헌의 ‘코로나에 숨어있기 좋은 영지 5’에 이은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의 ‘서울의 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5’.

서울은 넓다. 서울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는 것은 두 번에 걸친 확장 때문이다. 1936년에 영등포 지역을 병합하면서 처음으로 한강 남쪽과 북쪽을 아우르게 되었다. 1963년에는 오늘날의 서울을 이루는 외곽 지역 대부분이 편입되었다. 중구·종로구의 가난한 시민들은 관악·은평·강북·강동구 등으로 흩어졌다. 빈곤 탈출과 성공을 찾아 들어온 수많은 이촌 향도민도 대개는 외곽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래도 여전히 남산과 북악산 사이의 좁은 구역만이 ‘진짜 서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편견과 착각을 깨기 위해서는 현대 서울을 둘러싼 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조망하고, 새로이 서울에 편입된 지역에서 옛 서울의 산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서울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느낄 수 있다.

①안산에서 남산을 바라보다

새로운 서울을 확인하는 첫 단계는, 조선시대 한양의 서북쪽 외곽 안산 자락에 오르는 일이다. 등산복을 입고 해발 296m의 안산 정상에 오르자는 것은 아니다. 안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현저동으로 가는 것이다.

한양의 서북쪽 외곽이었던 현저동 주택가에서 본 남산(왼쪽). 약 10m만 비켜 계단 위에 서면 거미줄처럼 얽힌 전선에서 오랜 삶의 흔적이 드러난다. /유창우 영상미디어 기자

오늘날 현저동 대부분은 옛 서대문 형무소와 군부대와 한성과학고가 차지하고 있다. 이 학교 북쪽의 급경사면에 우리의 첫 목적지가 있다. 2~3층 벽돌 건물이 빼곡히 서 있고, 건물 사이로 좁은 골목과 턱이 높은 계단이 놓여 있다. 한낮에도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건물들 사이의 좁은 골목을 걷고 있자면, 이탈리아의 중세 성곽 도시 시에나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현저동은 이런 독특한 모습에 걸맞은 문학적 세례를 받았다. 박완서 선생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바로 이곳을 무대로 나왔다. 개성에서 서울로 온 그의 가족은 ‘서울의 문밖’인 현저동에서 6·25전쟁을 맞이한다. 사람들이 모두 남쪽으로 피란 가고 텅 빈 사대문 안을 바라보며 박 선생은 ‘거대한 공허’를 느꼈다고 적었다. 가끔씩 현저동 비탈길을 올라, 박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동남쪽으로 사대문 안과 그 너머 남산을 바라본다. 꿈꾸며 상경했으되 가난하여 사대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의 문밖’에 멈춘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린다.

☞서대문구 현저동 1-355 부근, 독립문역에서 도보 7분 거리

②관악산에서 북한산을

이렇듯 가난한 자들은 한양·경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을 맴돌았다. 설사 진입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들의 자리는 청계천변과 같은 버려진 땅뿐이었다. 그나마 1960년대에 사대문 안을 정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다시 사대문 밖으로 밀려났다.

옛 수재민촌이던 관악산 북쪽 기슭에서 바라본 북한산. /유창우 영상미디어 기자

이들을 내보낼 땅은 많았다. 1963년에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입된 서울시 외곽의 구(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5년, 사대문 안팎에 물난리가 나면서 사대문 안 빈민들이 관악구 봉천동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관악산 북쪽 기슭의 빈 땅에 천막을 치고 정착하자, 사람들은 이 지역을 수재민촌이라 불렀다. 관악구의 진정한 출발이다.

오늘날 수재민촌은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되어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지만, 삼성동이라는 관악산 북쪽 기슭의 계곡에 서면 1960년대 관악구의 원초적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경관이 펼쳐진다. 197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밤골마을에서 북쪽으로는 여의도의 파크원 빌딩이, 그 너머로 북한산이 보인다. 서울시의 남쪽 경계인 관악산에서 북쪽 경계인 북한산을 바라보면, 메트로폴리스 서울이 얼마나 넓고 이 땅 사람들이 얼마나 극적으로 살아왔는지를 절감할 수 있다.

☞관악구 원신10길 29-4, 삼성산성지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2분 거리

③신사동 강남상가아파트에서 관악산·남산·북한산을

서울 최초의 강남은 오늘날의 강남·서초·송파구가 아니라 영등포 지역이었다. 현재의 영등포구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양천구, 남쪽으로는 구로·금천구, 광명·안양시, 동쪽으로는 관악·동작구와 서초구 일부를 포괄하는 범(汎)영등포권에는 오늘날도 ‘강남’이라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의 강남은 ‘영동(永東)’, 즉 ‘영등포 동쪽’이라 하는 허허벌판일 뿐이었다, 1966년에 ‘영동 개발’이 시작되면서, 서울의 경제적 중심은 남산타워가 상징하는 사대문 안에서 63빌딩이 상징하는 여의도를 거쳐 롯데월드타워가 상징하는 오늘날의 강남 지역으로 옮겨 왔다.

신사동 강남상가아파트 옥상에서 본 영등포권의 관악산. 이 장소에서 북쪽을 보면 강북의 남산과 북한산이 보인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강남’이라 불리던 곳은 영등포 지역이었다. 지금의 강남인 영동 지역은 예전엔 영등포 동쪽의 벌판이었으나 1966년 영동 개발이 시작되면서 서울의 경제적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신사역 동북쪽, 이름부터 강남다운 강남상가아파트 옥상에 서면, 북쪽으로는 강북의 남산과 북한산이, 서쪽으로는 영등포권의 관악산이 보인다. 영등포 동쪽의 벌판에 불과했던 영동 지역이 영등포의 별칭인 강남이라는 단어를 빼앗아 오고, GANGNAM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 알려지는 과정을 이곳에서 압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강남구 압구정로2길 46. 주민이나 상가 손님이 아니라면 옥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환영받지 못할 수 있음

④고속버스터미널 옥상에서 남산과 북한산을

영동 개발의 상징은 1973년의 반포 주공아파트 건설이었다. 원래 아파트는 중하층 시민을 대상으로 세우던 것이었으나, 1970년에 와우아파트가 붕괴하면서 이러한 흐름은 중단되었다. 그 대신, 강북에 이촌시범아파트, 강중(여의도)에 여의도시범아파트, 강남에 반포주공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중상층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상품으로 탈바꿈했다.

고속버스터미널 옥상에서 바라본 남산과 강남 아파트단지.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1976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신반포라고 하는 터미널 주변에는 한신·우성·경남아파트와 같은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잇달아 서며 고급 아파트 붐을 일으켰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이 단지들 중 상당수는 이미 재건축을 마쳤거나 공사가 한창이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옥상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1970년대부터 반세기 만에 그 모습을 바꾸고 있는 강남 아파트 단지 너머로 남산과 북한산이 보인다. 저 남산과 북한산 사이에 자리한 사대문 안 인구를 줄여서 북한과 있을 전쟁에 대비하려 한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이 오늘날 강남을 만들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경부선 터미널 건물 엘리베이터로 옥상에 오를 수 있음

⑤삼성리토성에서 아차산과 남한산을

사람들이 서울 사대문 안을 서울의 정수(精髓)라고 믿는 것은, 그곳이 조선 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서울시는 그 전에도 수도였던 적이 있다.

청담배수지공원에서 한눈에 보이는 남한산과 롯데월드타워.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백제는 충청도 지역 국가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에 이르는 근 700년 백제 역사 전체에서 3분의 2 이상의 기간 왕성이 있었던 곳은 서울시 송파구 지역이다. 가장 오래된 서울은 사대문 안이 아니라 바로 이곳 송파구다. 이곳에 자리한 백제는 크게 세 곳에 성을 쌓았다. 그 가운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보존되었지만, 강남구 삼성동의 삼성리토성은 영동 개발 때 파괴되었다. 이곳이 백제와 관계된 성터라는 사실은 조선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으니, 그 사실을 모르고 무심코 훼손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삼성리토성의 흔적은 봉은사와 경기고 사이의 언덕부터 동쪽으로 봉은중학교 옆 청담배수지공원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남아 있다.

청담배수지공원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한강 북쪽의 아차산과 한강 남쪽의 남한산이 바라보인다. 아차산에 요새를 꾸민 고구려가 한강 남쪽의 백제와 충돌한 역사부터,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가 1637년에 청의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사건, 한때 영등포에 이어 제2의 강남으로 개발될 뻔했던 천호 지역, 사대문 안에서 트럭에 실려 쫓겨난 빈민들이 도착한 남한산 남쪽 기슭의 성남 광주 대단지, 이들이 천호 지역에 접근할 수 있도록 중개지로서 개발된 잠실, 남한산 서쪽 기슭의 군부대 옆에 있엇던 마천·거여 빈민촌, 남산타워와 63빌딩에 이어 서울의 세 번째 상징으로 건설된 롯데월드타워에 이르기까지, 2000년 서울 전체를 이곳에서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서울이다.

☞강남구 삼성동 82 청담배수지공원까지 청담역에서 도보 6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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