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361] 고요하고 기이한 공포

우정아 교수 2021. 1. 1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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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수'(1914), 캔버스에 유채, 87x72.4cm, 개인 소장.

살인마가 칼을 들고 덤빈다고 무서운 그림이 아니다. 누가 봐도 뻔한 공포에 매우 놀랄 관람자는 없다. 오히려 모든 게 평범한 그림이 무서울 때가 있다. 그리스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888~1978)의 ‘거리의 신비와 우수’가 그렇다.

하늘은 어둑한데 쨍한 빛이 가위로 도려낸 듯 날카로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햇빛인지 달빛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밝은 조명은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로마식 광장 한가운데 선 거대한 동상의 그림자를 바닥에 길게 드리웠다. 한 소녀가 긴 머리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굴렁쇠를 굴리고 있다. 좁은 골목을 지나 이제 막 탁 트인 광장으로 뛰어나갈 판인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고요하기 그지없다.

혹시 굴렁쇠에 집중하느라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나온 줄도 모르는 걸까? 바로 앞에 문짝을 활짝 열고 선 텅 빈 화물칸이 당장이라도 소녀를 잡아들일 듯 불길해 보인다. 어두운 건물 안에는 과연 아무도 없는 걸까? 건물 뒤의 거대한 그림자는 정말 움직이지 않는 동상의 것일까? 설마 동상만큼 몸집이 큰 어른이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뛰어가는 소녀를 숨죽여 기다리다 어디론가 끌고 가버리진 않을까? 오른쪽의 어두운 건물에 비해, 눈부시게 흰 왼쪽의 아케이드는 터무니없이 가파른 대각선으로 그려져 땅 전체가 급히 기울어진 것 같다. 혹시 이 건물이 소녀와 굴렁쇠를 순식간에 빨아들여 긴 깃발이 휘날리는 저 먼 곳까지 보내버리지는 않을까? 소녀가 영영 되돌아올 수 없는 건 아닐까?

키리코는 이처럼 고요하고도 명징한 분위기가 볼수록 기이한 공포감을 자아내는 그림으로 이후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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