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국칼럼] 누가 민주주의의 적인가

배연국 2021. 1. 18.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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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를 해치는 최대 위협요인은
쿠데타 세력 아닌 선출된 권력
대통령이 민주적 통제 외면하면
트럼프 재앙 피할 수 없을 것

사필귀정이다. 조 바이든이 도널드 트럼프의 몽니를 물리치고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는 역사 속으로 퇴장했어도 그가 남긴 정치 교훈까지 묻어버려선 안 된다. 분열과 선동정치의 위험성 말이다. 최근 일어난 극렬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점령은 그 극단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헌법의 수호자인 대통령도 헌법을 파괴하는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사례에서 보듯 21세기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 요인은 쿠데타 세력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다. 헌정 질서를 짓밟고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도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그는 헌법의 대통령 연임 규정을 허물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파괴했다. 동유럽 국가 중 민주주의 우등생으로 꼽혔던 폴란드의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언론을 장악하고 사법부를 ‘코드 인사’로 채웠다.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은 야당을 겁박하기 위해 방탄조끼를 입고 자동소총을 들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36년까지 러시아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쳤다. 앞선 실세 총리 재임을 합쳐 36년간 최고 권력을 누리는 셈이다. 현대판 차르의 등장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이들 국가는 외양적으론 민주의 틀을 갖추고 있다.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고 다당제를 취하고 있으나 누구도 민주국가로 대접하지 않는다.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 기능을 잃었기 때문이다. 민주적 통제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 하나의 바퀴는 삼권분립이라는 제도적 통제다. 원래 권력은 확대 지향의 속성이 있는 만큼 자기 통제가 어렵다. 민주주의 선각자들이 국가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 셋으로 쪼갠 이유다. 한쪽이 권력을 행사하면 나머지 둘이 감시하고 견제하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의 바퀴는 민주 규범에 의한 통제다. 미국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그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꼽았다. 상호 관용은 상대 진영을 나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경쟁자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제도적 자제는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권력 행사를 삼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 두 바퀴 중 하나만 빠져도 민주적 통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흔히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막으려면 법치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두 번째 바퀴인 민주 규범을 외면하면 독재나 전체주의로 추락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제도를 도입한 동구권 국가들이 줄줄이 독재의 길로 들어선 것도 민주 규범을 잃은 탓이 크다. 규범을 상실한 민주주의는 운전 규범을 무시하고 차를 모는 운전자와 같다. 설혹 법치의 형식을 띠더라도 법 앞에 평등을 구현하는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는 ‘법에 의한 지배’일 뿐이다.

요즘 우리의 민주주의가 법에 의한 지배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불길한 징조다. 여당은 미운털이 박힌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선 출마를 막는 법을 발의했다. 힘을 앞세운 입법 폭주는 제도적 자제가 아니라 상호 관용의 규범을 파괴하는 ‘제도적 남용’이다. 집권층은 윤 총장의 직무 복귀 판결이 나오자 사법부까지 공격했다. 민주적 통제를 외치는 자들이 민주 통제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흔드는 격이다. 더욱이 대통령 지시를 좇느라 출국금지요청서까지 조작한 행위는 통제의 우리를 뛰쳐나간 권력 일탈의 전형이다.

민주적 통제는 대통령이 국가 기관과 권력을 통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권력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주인인 주권자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 주권자가 국민이라는 게 우리 헌법의 대원칙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권력도 국민의 통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 통제의 본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겸손한 권력이 되겠다”고 했다.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가. 대통령 권력이 민주 통제의 궤도에서 벗어나면 민주주의는 탈선한다. 두 번이나 탄핵 위기에 처한 트럼프가 반면교사다. 교만한 권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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