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선정을 펼치다 오시라"는 덕담 / 이순혁

이순혁 2021. 1. 1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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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순혁 ㅣ 전국부장

10년쯤 전 일이다. 당시 담당하고 있던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 훈훈한 이야기가 돌았다. 술 좋아하는 한 고참 과장(3급 부이사관)이 지방우정청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해당 지역에서 정부과천청사까지 ‘1호차’가 모시러 왔더란 소식이다. 기껏해야 10명가량 부서원과 일하며 고생하다 30개 가까운 우체국에 수천명 직원을 통솔하는 기관장이 돼 금의환향하게 됐으니, 여유를 가지고 지역 순시도 다니며 맛난 향토 음식도 즐기다 돌아오면 되겠다는 부러움 섞인 말들이 뒤따랐다.

아울러 ‘이게 엠비(MB) 덕’이란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2008년 초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정보통신부를 해체하고 기존 방송위원회와 더해 방송통신위원회를 출범시켰는데, 이때 정통부 아래에 있던 우정사업본부를 지식경제부 산하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식경제부는 인사에 숨통이 트였지만, 졸지에 우정사업본부를 빼앗기게 된 정보통신 쪽 관료들은 두고두고 이를 아쉬워했다. 방송통신 융합 등을 명분으로 한 정부조직 개편이었건만, 누군가에는 ‘자리’가 실존적 문제로 다가왔던 셈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 한쪽이 찜찜했다. 그 지방에서 우체국 말단으로 입사해 성실하게 일한 이들은 과연 어느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의문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우정사업본부뿐이겠는가. 일선 기자 시절 바라본 고위직 경찰과 판검사들은 예외 없이 지방을 다녀와야 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게 승진과 함께 지방으로 갈 때였다. 부장판사·부장검사 승진과 함께 지방으로 가는 판검사들은 판검사 3~4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지원·지청의 지원장·지청장 자리를 가장 선호했다. 2~3개 시·군을 묶어 관할하는 기관장인데다, 시골인 만큼 일이 적어 업무 부담도 덜했기 때문이다. “선정을 펼치다 오시라”는 덕담을 들으며 부임한 뒤엔 한달에 한두번씩 있는 각종 기관장 모임, 법사랑(범죄예방)위원 행사 등을 통해 지역 실력자나 유지들과도 자연스레 인연을 맺었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서도 몇몇 인연은 이어졌고, 일에 고단해질 때면 “(지방에 근무하던) 그때가 참 좋았는데…”라는 읊조림이 나왔다.

경찰도 총경으로 승진하면 거의 예외 없이 지방 서장으로 발령 난다. 일부는 해당 지방경찰청에 남아 관내 경찰서장과 지방청 참모(과장)를 오가며 정년까지 일하지만, 다음 승진을 염두에 두거나 서울에 가족을 둔 상당수는 곧 중앙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경찰청 본청이나 서울청에서 다시 실무자(과장)로 일하다 서울 시내 서장 등을 거친 뒤 경무관 승진심사 관문에 섰다. 이를 통과한 이 가운데 일부는 몇년 뒤 차장이나 지방청장이 돼 다시 지방으로 부임했다. 우체국·법원·검찰·경찰뿐이겠는가, 지방조직을 가진 중앙행정기관 모두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중앙에서 보자면 덕담이나 부러움을 유발하는 인사겠지만 그 기관장을 맞는 실무자들은 어떤 마음일까. “솔직히 해마다 바뀌는 기관장들은 손님 아니겠냐”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해마다 바뀌는) 서장 이름이 뭐더라”고 갸웃하던 지구대 경찰관도 봤다. 윗사람들은 윗사람들대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따로 있고, 자신들은 5~10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승진 기회나 기대하며 지낸다는 얘기였다.

그 ‘손님’들이 걷는 행로는, 과거에 합격한 뒤 내직(육조와 삼사 등)과 외직(현감과 군수, 관찰사 등)을 오가며 직급을 높여가던 조선시대 관료들이 걷던 길과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도 고을 수령은 계속 바뀌는 ‘얼굴마담’이고, 실제 지방 사회를 통제하고 이끌어간 건 아전들이었다지 않던가.

중앙(중심)과 지방(변방), 고위직과 중하위직, 고시 출신과 일반 출신으로 분리돼 따로 돌아가는 인사 시스템의 장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리더십으로 정부가 사회 전반을 주도해나갈 때나 어울리는 방식 아닐까. “연방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방분권제”(문재인 대통령)를 추구한다는 이 정부 기조와는 더욱이나 거리가 멀다. 말단에서 시작한 우체부나 순경이 그 지역 우체국장과 경찰서장은 물론 지방우정청장과 지방경찰청장에도 오를 수 있는 시절은 언제쯤 올까.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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