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엉뚱한 데에 한눈팔지 않아야 / 이철희

한겨레 2021. 1. 1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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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철희

지식디자인연구소장

“위기만이 진정한 변화를 낳는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말처럼, 진보가 코로나 위기를 계기로 사회경제적 재구성에 성공할 수 있을까? ‘각자도생’! 지난해 11월 <시사인>과 <한국방송>(KBS)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웹 조사에서 확인된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다. 이는 ‘연대’(solidarity) 가치의 실종을 뜻한다. 진보가 사회개혁에 성공해 보통 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한 나라들을 보면 그들은 일관되게 연대를 추구했다. 진보의 성공 사례인 뉴딜개혁이나 복지국가 시도는 각각 뉴딜연합과 복지동맹 등 다층적 연대 전략을 통해 사회경제적 변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집권한 한국의 진보가 케이(K) 방역이라는 외형적 성공에 자부심을 과시할 때, 그 속으로는 연대의 가치가 퇴색하고 각자도생의 경쟁 가치만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이 조사의 핵심 메시지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크게 피해를 본 그룹은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구직자, 중소기업일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이들에 대한 적극 지원 의사는 지난해 5월 조사에 비해 12~21%포인트 떨어졌다. 이웃 나라 일본과 비교해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에 찬성하는 의견이 5월 57%에서 11월 45%로 하락했다. 일본의 경우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 의견이 72%에 달했다. 재난이 깊어질수록 각자도생이 삶의 정석으로 더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각자도생은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생존법칙이다. 한 사회의 시대정신이 각자도생이라는 것은 결국 고단한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을 사회적으로 모색하는 대신 개인적으로 성공하는 데에만 목을 맨다는 의미다. 이래서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에 대한 ‘사회적’ 해법을 밀어붙일 동력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복지는 개인 삶의 개선을 도모하는 사회적 해법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재난은 이런 사회적 해법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되곤 했다. 물론 어떨 땐 성공하고 어떨 땐 실패했다.

1912년 타이태닉호가 침몰했다. 2000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 중 생존한 700여명의 대부분은 1등칸을 탄 부유한 승객들이었다. 이에 반해 배 밑바닥의 3등칸에 머물던 가난한 이들은 대거 사망했다. 사람 목숨에도 차별이 있냐며 여론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지지부진하던 연방소득세의 도입이 수정헌법 16조를 통해 미국에서 사상 최초로 입법화됐다. 그뿐인가, 사실 복지국가는 대공황-세계대전이란 엄청난 재앙을 계기로 삼아 마련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작년 6월9일 이렇게 말했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이 공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위기 극복에는 성공했지만 그때마다 소득 격차가 벌어졌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습니다. 오히려 위기를 불평등을 줄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7개월이 지난 지금, 과연 그 공식이 깨져 불평등이 줄어들고 있는가?

우리보다 국가부채가 더 많은 나라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코로나19로 인한 손실을 보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재정 타령이다. 입만 열면 재정 건전성을 되뇌고 민생 안정성은 뒷전이다. 이런 형편임에도 정부와 여당의 책임 있는 리더들이 이 완고한 재정보수주의의 틀을 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추-윤 갈등’이 아니라 재정 민주화에 쓰고,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에 쏟았다면 지금처럼 위축되고 수세에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능으로 인한 자업자득, 이것이 현 지지율 하락의 본질이다.

지난해 12월14일 대통령은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른 영업제한이나 금지로 인해 발생하는 매출 급감과 임대료 부담까지 자영업자에게 지우는 것이 과연 공정한지에 대한 물음이 뼈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회 전체가 그 고통의 무게를 함께 나누고 정부의 책임과 역할을 높여 나갈 방안에 대해 다양한 해법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진보세력은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고, 대중적 동의를 넓히고, 그럼으로써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사는 연대가 기본축이 되게 해야 한다. 지금 할 일은 이것이다. 엉뚱한 데에 한눈팔지 말고, 사회경제적 개혁에 매진해야 한다. 더 좋은 사회의 성패는 언제나 진보정치의 질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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