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진보의 정체성 정치

이철희 2021. 1. 1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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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도 사상은 남는다고 했던가.

거시적 사회경제 변혁의 비전을 상실하고, 그 변혁의 가능성이 소멸되는 과정에서 진보는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를 선택했다.

진보에게 정체성 정치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회피하는 '편리한 대용물'이었다.

"오늘날 진보 좌파에게는 산업 자동화가 야기하는 대량실업 문제를 해결할, 또는 기술 발전으로 모든 미국인이 겪을 수 있는 소득격차 문제를 해결할 전략이 없다." 진보의 정치적 무능이 트럼피즘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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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도 사상은 남는다고 했던가. 트럼프는 졌지만 트럼피즘(Trumpism)은 지지 않았다. 트럼피즘은 일시적 현상으로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도대체 왜 이처럼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쓴 이유다. 미국의 정치제도가 쇠퇴하고, 스스로 개혁할 역량을 상실한 결과로 트럼프 현상을 진단한다. 그는 미국 정치의 현실을 비토크라시(vetocracy)로 명명하는데, “상대 정파의 정책을 무조건 거부하는 극단적인 파당 정치가 나타나고, 조직력을 갖춘 이익집단들이 다수의 행동이나 의지를 가로막는 현상”을 뜻한다. 비토크라시에 신물이 난 탓에 이런 교착상태를 혁파해줄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으로 트럼프가 등장했다는 얘기다.

20세기의 정치는 경제 이슈를 중심으로 평등의 좌와 자유의 우가 대결하는 구도였다. “진보 정치는 노동자와 노조를 중심으로, 그리고 더 나은 사회보장과 경제적 재분배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반면 우파는 정부의 크기를 줄여 경제적 간섭을 최소화하고 민간부문을 확대하는 것에 주력했다.”

21세기 들어 정치를 가르는 핵심 이슈는 경제에서 정체성으로 바뀌었다. “좌파는 경제적 평등의 확대보다는 흑인, 이민자, 여성, 히스패닉, 성소수자, 난민 등 다양한 소외된 집단의 권익을 증진하는 데 더 힘을 쏟아왔다. 한편 우파는 대개 인종이나 민족성 또는 종교와 연결된 전통적인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애국자로 스스로를 재정의한다.” 경제적 고통은 존엄성의 상실로 다가온다. 사회경제적으로 퇴보한 백인 노동자 계층의 인식이 바로 그랬다. “트럼프를 백악관에 입성시킨 미국의 민족주의 부흥에 가장 강력한 힘을 실어준 요인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다는 기분을 느낀 국민들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진보세력의 실패에 대한 분석이다. 미국의 진보는 점점 더 소외된 더 작은 집단들에 집중해왔기 때문에 수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거시적 사회경제 변혁의 비전을 상실하고, 그 변혁의 가능성이 소멸되는 과정에서 진보는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를 선택했다. 노동자 계층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후쿠야마의 지적은 통렬하다. 진보에게 정체성 정치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회피하는 ‘편리한 대용물’이었다. “오늘날 진보 좌파에게는 산업 자동화가 야기하는 대량실업 문제를 해결할, 또는 기술 발전으로 모든 미국인이 겪을 수 있는 소득격차 문제를 해결할 전략이 없다.” 진보의 정치적 무능이 트럼피즘을 낳았다. 우리는 괜찮을지 걱정이다.

이철희 (방송 진행자·전 국회의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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